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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시대의 빛과 그림자 - 민주화와 산업화 문제를 중심으로, 도시, 생활을 바꾸다 (1960~70년대 사회/문화)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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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시대의 빛과 그림자 - 민주화와 산업화 문제를 중심으로, 도시, 생활을 바꾸다 (1960~70년대 사회/문화)

bangla 2017. 4. 20. 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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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시대의 빛과 그림자 - 민주화와 산업화 문제를 중심으로


오제연(성균관대)


도시, 생활을 바꾸다 (1960~70년대 사회/문화)

 

1960년대 이후 본격화된 경제성장과 근대화는 한국 사회 전반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수많은 변화 중에 가장 특징적인 것은 이촌향도였다. 이촌향도는 말 그대로 촌을 떠나 도시로 향한다는 뜻인데, 농촌사회의 해체와 도시화를 상징하는 말이었다. 1960년도에 전체 인구의 65%를 차지했던 농민은 1980년에는 33.5%로 격감했다. 노동자는 1960년도에 불과 9.2%였는데 1980년도에는 37.2%가 되어 농민보다 더 많아졌다. 숫자로 보면 1960년도에 겨우 60만에 지나지 않았던 노동자가 1975년에는 265만 명이 넘어 거의 4배가 늘었다.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초까지 매년 50만 명이 넘는 농민들이 도시로 이주해 노동자나 도시빈민으로 살아가게 되었다.

이렇게 이촌향도가 심화되면서 서울의 인구는 1978년도에 750만 명에 달했고 1980년대에는 천만 명을 넘어섰다. 서울뿐만 아니라 서울 주변의 소위 위성도시들도 인구가 폭증하게 되었다. 인천은 물론이고 성남시, 안양시, 부천시 등은 대표적인 서울의 위성도시였다. 서울을 포함해 그 주변의 수도권 지역은 전체 인구의 절반 가까이가 몰려살게 되어 인구밀도가 매우 높아지게 되었다. 그 외에도 부산, 울산, 포항, 마산 등 경제개발이 집중적으로 이루어진 도시들의 인구도 크게 증가하였다.

서울은 인구만 늘어난 게 아니라 도시의 외관도 엄청나게 바뀌었다. 1969년에는 삼일고가도로가 완공되었고 다음해인 1970년도에는 당시 한국에서 제일 높은 빌딩이었던 31빌딩이 세워져 서울의 스카이 라인을 바꾸었다. 1970년에는 남산1호 터널이 개통되었고 1974년에는 지하철 1호선이 개통되어 본격적인 지하철 시대를 열었다. 또한 1975년에는 지금을 서울타워로 이름을 바꾼 남산타워가 세워졌다. 또한 마포, 잠실, 영동, 천호대교 등 한강다리도 엄청나게 늘어났고 강남을 중심으로 고층 아파트가 대대적으로 건설되어, 서울은 상전벽해란 말이 실감나게 되었다.

 

이렇게 외관상으로 서울은 크게 발전한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여러 가지 문제도 생겨났다. 수많은 사람들이 단기간 내에 도시로 밀집하게 되면서 각종 사회문제가 발생하게 되었다. 대표적인 것이 주택문제였다. 도시 주택 보급률은 1960년에는 64.8%에 달했지만 1975년에는 56.9%, 1980년에는 56.6%로 떨어졌다. 주택이 턱없이 부족하기도 했고 시골의 가난한 농민들이 서울에서 집 한 칸 장만한다는 것은 정말로 큰일이었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은 달동네로 불리는 산꼭대기까지 무허가 판잣집을 짓고 살아야 되었다. 달동네는 높은 고지대이기 때문에 수돗물도 잘 나오지 않았고 화장실도 따로 없는 집이 많아서 여러 집이 공동 화장실을 이용하는 경우도 많았다.

서울로 인구가 너무 집중되어 기존 시가지만으로는 인구를 감당할 수 없게 되자 새로운 시가지로 강남지역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1970년대 새롭게 개발된 강남에는 10층이 넘어가는 고층 아파트가 즐비하게 들어섰다. 강남개발이 진행되면서 본격적인 땅투기 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다. 개발정보만 잘 파악해서 미리 땅을 사두었다가 개발된 후에 팔게 되면 엄청난 이득을 남길 수 있게 되었다. 이른바 복부인으로 불리는 땅투기꾼들이 강남일대를 횡행하게 되었고 점차 인근 지역으로도 확산되었다. 땅투기를 통해 갑자기 큰 부자가 된 사람들을 흔히 졸부라고 부르게 되었다. 서울은 이렇게 한편에서는 졸지에 큰 부자가 된 사람들이 돈을 물쓰듯 쓰면서 사는가 하면, 시골에서 올라온 가난한 농민들은 달동네 판잣집에서 매일매일 힘겹게 살아가는 모습이 공존하는 곳이 되었다.

아파트가 지어지면서 끔찍한 사고도 일어났다. 197048일 오전640분 경 서울시 마포구 창전동에 위치한 와우지구 시민아파트 515동이 무너져 33명이 주고 40명이 다치는 엄청난 인명피해가 나기도 했다. 이 아파트는 입주한 지 불과 20일 만에 사고가 난 것이었고 사고원인은 전형적인 부실공사였다. 철근 70개를 넣어야 지탱할 수 있는 기둥에 달랑 5개의 철근만 사용할 정도로 엉터리 공사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이는 전형적인 속도주의, 성장만능주의의 결과였다. 공사내용이야 어찌되었든 무조건 빨리빨리 많이만 지으면 좋다는 사고방식과 돈밖에 모르는 세태가 낳은 엄청난 인재였다.

 

교통과 통신 및 매스컴의 발달도 도시화가 급속하게 진행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7077일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된 것은 사람들의 삶을 커다랗게 바꿔놓았다. 서울과 부산을 불과 6~7시간 내외로 이동할 수 있게 되면서 사람들의 생각도 많이 바뀌게 되었다. 고속도로를 타고 몇 시간이면 서울에 갈 수 있었기에 서울로의 집중은 더욱 심해지게 된 것이었다. 고속도로가 뚫리면서 전국 일일생활권이 가능해지기도 했지만 그것은 서울 중심의 발전을 가속화하기도 했던 것이다. 경부고속도로뿐만 아니라 경인, 호남, 영동 고속도로도 개통되었고 철도도 많이 확충되어 그야말로 전국의 어느 곳이나 불과 몇 시간 만에 갈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고속도로 등의 물리적 이동수단의 확충과 함께 전화와 같은 통신수단의 보급도 대폭 확대되었다. 1965년도까지만 해도 22만여 대에 불과해 부유층 소유물로 여겨졌던 전화가 1975년에는 117만여 대가 되었다. 1970년대 후반이 되면 시골마을에도 전화 한 대 정도는 보급되는 상황이었고 전국 어디에서든지 육성으로 통화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그만큼 사람들의 관계 또한 긴밀해졌다.

방송과 신문, 라디오 등 언론매체의 발달도 빼놓을 수 없는 변화였다. 먼저 라디오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해방 직후 10만 대도 안되던 라디오는 1965년에 125만대로 늘어나 가장 대중적인 방송매체가 되었다. 그러나 사람들의 삶을 가장 크게 바꾼 것은 텔레비전이었다. 19643만여 대에 불과했던 텔레비전은 1975년도에는 180만대, 1980년도에는 690만 대로 늘어나 라디오를 제치고 가장 중요한 방송매체가 되었다. 1980년도에는 100가구 당 86.7가구에 텔레비전이 보급되었는데, 이는 10집이면 9집 가량은 텔레비전이 있었다는 것이며 거의 모든 집에 다 텔레비전이 보급되었다고 볼 수 있었다.

 

도시의 삶은 농촌의 삶과 많은 것이 달랐다. 도시에서는 서로 알고 지내는 경우가 드물었다. 한 동네는 물론이고 같은 아파트에 살아도 옆집에 누가 사는지 모르고 사는게 일반적인 도시의 삶이었다. 또 일터와 주거공간도 멀리 떨어져 있어 출퇴근을 하게 되면서 동네 사람들과의 관계는 더욱 드물게 되었다. 동네 사람들과의 관계가 멀어지는 것과 함께 가족형태도 많이 바뀌었다. 보통 3대에 걸쳐 온 가족이 함께 사는 농촌과 달리 도시에서는 이른바 핵가족이 대표적인 가족형태였다. 즉 부모와 자식으로만 이루어진 가족형태가 일반적이었고 식구 수도 4~5명 정도로 줄어들었다.

핵가족이 되는 것은 자녀를 적게 낳는 것과 밀접하게 관련되었다. 1950년대 중반 베이비붐 이후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자 정부에서는 둘만 나아 잘 기르자는 표어를 내걸고 대대적으로 가족계획운동을 펼쳤다. 공무원들은 자식이 2명 이상이면 이런저런 불이익을 받게 되었고 자식을 많이 낳는 사람들은 야만적인 사람들로 손가락질을 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2000년대 이후 저출산 문제로 큰 고민에 빠진 현재의 한국 사회와 비교해 볼 때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

사회가 변화하면서 여성들의 삶도 엄청난 영향을 받게 되었다. 대표적인 것이 여성들의 사회활동 참여 증가였다. 1975년 중등교육을 받은 여성들이 전체에서 약 40%를 차지할 정도로 교육이 확대되면서 여성들의 사회참여가 활발해진 것이었다. 특히 가부장제 전통이 강하여 여성억압이 심했던 농촌지역 여성들에게 도시는 일종의 탈출구와 같은 곳이 되었다. 물론 도시로 탈출한 여성들의 삶이 마냥 행복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도시의 삶은 변변한 학력과 배경, 가진 재산도 없었던 나이어린 여성들에게 가혹하기 그지없었다. 그들의 삶은 대부분 식모, 여공, 다방 종업원, 버스 안내양 등의 고된 노동을 전전하는 것일 수밖에 없었다. 고된 노동에 내몰리는 여성들은 손쉽게 돈을 벌 수 있다는 유혹에 유흥업소 종업원으로 전신하는 경우도 많았다.

 

경제개발에 따른 도시화는 문화 영역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자유분방한 서구의 문화와 생활방식이 한국사회에 본격적으로 들어오면서 유행에 민감한 젊은이들 사이에서 1970년대부터 소위 청년문화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의 청년문화를 상징하는 것은 통기타와 청바지(블루진) 그리고 생맥주였다. 이 세 가지를 줄여서 통블생이라 부르기도 했는데, 대단한 열풍으로 청년층을 사로잡았다.

청년층의 새로운 상징이 된 청바지나 생맥주 또한 미국의 대중적 생활양식이 도입된 것이었다. 여기에 하나 더 추가될 수 있는 것이 장발이었다. 장발 역시 미국의 영향이 컸다고 할 수 있었는데, 히피문화의 일환으로 한국에서도 크게 유행했다. 그래서 장발머리에 기타를 둘러메고 청바지를 입은 채 생맥주를 마시는 것이 1970년대 도시 청년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여성층에서는 미니스커트, 핫팬츠 등이 본격적으로 유행하기 시작했다. 미니스커트는 이미 1967년 가수 윤복희가 처음 소개한 바 있었는데 1970년대 들어 크게 유행해 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불과 10년 전만 해도 상상조차 하기 힘들었던 짧은 치마가 대유행을 한 것은, 그만큼 한국사회가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보여줬다. 생활방식 뿐만 아니라 사고방식이나 감수성도 많이 바뀌었다. 최인호 등과 같은 새로운 청년작가들은 이전과는 다른 감수성으로 <별들의 고향> 같은 작품을 써서 공전의 히트를 치기도 했다.

물론 이러한 청년문화는 도시에서 공부하는 대학생 중심의 문화였다. 당시의 대학생들은 상대적으로 혜택받은 계층으로서 해외의 새로운 생활방식을 자연스럽게 수용하는 주된 집단이었다. 대학생층을 제외하고 이러한 청년문화를 만끽할 수 있는 사람들은 별로 많지 않았다. 특히 도시와 달리 문화적 혜택을 누리기 힘들었던 농촌지역에서 도시지역의 청년문화는 먼 남의 나라의 일과 같은 것이기도 했다.

 

그런데 청년문화에 대한 박정희 정권의 대응은 매우 신경질적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청년문화와 같이 자유를 추구하는 사회적 현상을 철저하게 통제하고자 했다. 박정희 정권의 사회통제 시도는 이미 1960년대 후반 안보위기 이후 본격화되고 있었다. 북한 124군 부대 31명이 청와대를 기습하기 위해 남파된 19681.21사태를 시작으로 이틀 뒤인 23일에는 동해상에서 미군 정보함 푸에블로호가 납치되었고 10월 말에는 울진삼척에 무장공비 120여명이 침투한 사건이 연이어 발생했다. 1969415일에는 미군 정보기 EC 121기가 북한군에 의해 격추되는 등 남북한, 북미간 긴장이 극도로 고조된 것이 1960년대 후반의 안보위기였다.

안보위기에 대응해 박정희 정권은 주민등록제도를 전면적으로 실시하고 향토예비군을 창설했으며 국민교육헌장을 제정하여 한국 사회 전반에 대한 제도적, 정신적 통제를 강화하고자 했다. 청년문화에 대한 통제도 이러한 사회통제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졌다. 대표적인 것이 장발과 미니스커트 단속이었다. 유신체제는 길거리에서 장발을 한 사람들을 단속해 강제로 머리를 깍았다. 장발이 미풍양속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또한 여성들의 치마 길이도 제한해 미니스커트를 못입게 하였다. 무릎위 20cm 이상 올라가는 치마를 입은 여성들도 길거리에서 단속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길거리에는 머리를 깍기 위한 바리깡과 치마 길이를 재기 위한 자를 휴대한 경찰들이 심심치 않게 눈에 띄는 웃지못할 풍경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대중문화에 대한 통제도 극심했다. 대표적인 것이 금지곡이었다. 각종 이유를 붙여 수많은 노래를 금지곡으로 만들었는데, 그 중에는 웃지못할 이유로 금지곡이 된 것이 많았다. 일례로 김추자의 <거짓말이야>라는 노래는 사회 불신풍조를 조장한다는 이유로, 신중현의 <미인>한 번 보고 두 번 보고 자꾸만 보고 싶네라는 가사가 풍기문란이라는 이유로, 김민기의 <아침이슬>은 노래는 단지 가사가 비관적이라는 이유로 금지곡이 되었다. 1975년에는 대마초사건을 빌미로 청년문화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던 신중현을 비롯한 수많은 록 가수와 포크 가수들의 활동을 모조리 금지시켰다. 이렇듯 박정희 정권은 정치영역은 말할 것도 없고 대중문화나 개인의 기호와 취향까지도 강제적으로 통제하였다. 이러한 통제는 일시적으로는 효과가 있었을지 모르나 자유를 향한 사람들의 열망을 뿌리 뽑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한국의 민주주의는 이러한 자유에 대한 열망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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