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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시대의 빛과 그림자 - 민주화와 산업화 문제를 중심으로

bangla 2017. 4. 20. 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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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시대의 빛과 그림자 - 민주화와 산업화 문제를 중심으로

 

 

오제연(성균관대)

 

 

박정희, 힘으로 권력을 차지하다 (5.161960년대 정치)

 

19604.19혁명으로 이승만 독재가 무너지면서 한국의 민주주의는 다시 회복되기 시작했다. 우선 국회는 우선 대통령 한 사람에게 지나치게 권력이 집중되어 있는 기존의 대통령중심제 헌법을, 국회의 다수당이 정권을 차지하는 내각책임제 헌법으로 개정했다. 그리고 1960729일 새로운 헌법에 따라 국회의원 선거를 실시하였다. 그 결과 민주당의 장면이 국무총리로서 국정을 이끄는 새 정부가 수립되었다. 장면 정권은 과거 이승만 정권 시절 발생한 부정선거나 부정축재 같은 여러 잘못들을 바로잡는 한편, 경제 자립을 위해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수립하는 등 경제제일주의 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장면 정권은 1961516일 박정희 육군소장이 이끄는 군부의 쿠데타’, 군사정변으로 인해 1년도 못돼 붕괴되었다. 헌법 절차에 의해 국민의 손으로 만들어진 장면 정권을 총칼로 무너뜨리고 권력을 뺏어간 박정희와 군부는, 자신들이 4.19혁명 이후 발생한 사회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구국(救國)의 결단을 했다고 주장했다. , 군사정변을 혼란에서 나라를 구하기 위한 행위로 합리화한 것이다.

19604.19혁명 이후 수많은 시위가 일어났던 것은 사실이다. 특히 남북학생회담추진같은 통일운동과 교원노조설립시도같은 노동운동이 활성화되었다. 그러나 이는 1950년대 이승만 정권의 억압에 의해 풀리지 않았던 과제들을 4.19혁명 후 한꺼번에 해결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것으로, ‘혼란이라기보다 민주주의의 기본 전제라고 할 수 있는 다양한 의견의 분출일 뿐이었다.

또한 생각만큼 빨리 성과를 내지 못하는 장면 정권이 무능하다는 비판도 나왔다. 하지만 장면 정권이 4.19혁명 이후 한꺼번에 제기된 여러 과제들을 해결하기에 시간이 매우 부족했다. 무엇보다 박정희 육군소장과 김종필 등 군사정변 주도세력들은 이미 4.19혁명 이전부터 군사정변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따라서 4.19혁명 이후 혼란이나 장면 정권의 무능 때문에 군인들이 군사정변을 일으켰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군사정변 성공 직후 군사정변 주도세력은 군사정부, 군정을 만들어 통치를 시작했다. 군정은 반공국시(國是)’, 즉 국가의 기본이념으로 내걸고, 4.19혁명 직후 고양되었던 통일운동, 노동운동 등을 탄압했다. 아울러 장면 정권에서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부정축재자와 부정선거 관련자 처벌을 단행하고, 외제사치품이나 정치깡패 등 사회악(社會惡)을 일소하는 모습을 보였다. 국민들은 이러한 군정의 모습을 보고 두려움과 기대감을 동시에 가졌다.

그런데 군사정변 당시 군사정변 주도세력들은 장차 사회가 안정되면 군정민정’, 즉 민간인이 다스리는 민간정부로 바꾸겠다고 약속한 바 있었다. 하지만 박정희나 김종필 등은 민정이양 이후에도 군복을 벗고 민간인으로 변신해 권력을 계속 유지하고 싶었다. 이에 민주공화당(약칭 공화당)’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를 창설했다. 공화당은 군사정변 주도세력들이 민간인으로 변신한 이후 정치활동을 위해 필요한 조직이었고, 중앙정보부는 다양한 정치 정보 수집과 공작 활동을 벌임으로써 정권의 창출과 유지에 꼭 필요한 기구였다.

196212월 군정은 장면 정권 당시의 내각책임제 헌법을 완전히 폐기하고 다시 대통령중심제 헌법을 만들었다. 새 헌법에 따라 196310월 민정이양을 위한 제5대 대통령선거가 실시되었다. 선거는 군복을 벗고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로 출마한 박정희와, 장면 정권 당시 상징적 국가원수인 대통령이었던 민정당 윤보선의 대결로 압축되었다. 이 선거에서는 강력한 조직력과 자금력, 그리고 젊음과 민족주의를 앞세운 박정희가 과거 남로당(좌익) 활동 논란과 군사정변 자체에 거부감을 극복하고 15만 표라는 박빙의 차이로 승리하였다. 이로써 5.16군사정변 후 2년 넘게 지속된 군정이 끝나고, 헌법과 선거에 의해 합법적으로 만들어진 새 정권이 출범하게 되었다.

 

박정희 정권 초기에 발생했던 가장 큰 사건은 한일협정 체결과 베트남전쟁 파병이었다. 19458.15 광복으로 일제가 한반도에서 물러난 이후 오랫동안 한국과 일본은 정식으로 국교를 정상화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이승만 정권 시절부터 미국은 동아시아에서 공산진영에 대항하기 위해 같은 미국의 동맹국이었던 한국과 일본의 협력을 지속적으로 요구하고 있었다. 이에 1951년부터 한국과 일본은 국교정상화를 위한 회담에 나섰으나, 한국과 일본 사이에는 과거사 문제뿐만 아니라, 청구권 문제, 어업권 문제, 재일교포 지위문제, 문화재 반환 문제 등 여러 가지 복잡한 쟁점들이 많아 협상은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했다.

1950년대까지 답보상태를 면치 못하던 한일회담은 1960년대에 들어와 장면 정권 때부터 속도를 내기 시작하더니, 19615.16군사정변 이후 급진전되기 시작했다. 박정희는 군사정변이라는 정당하지 못한 권력 장악 때문에 발생한 권력의 정통성문제를, 급속한 경제성장을 통해 해결하고자 했다. 그러나 경제성장을 위해서는 일단 밑천’, 자본이 필요했다. 이 때 일본은 한국이 자본을 끌어다 쓸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곳이었다. 그래서 박정희 정권은 최대한 빨리 한국과 일본의 국교를 정상화하고자 했다. 하지만 한일회담 타결을 위해 박정희 정권이 일본에 너무 많은 것들을 양보하자, 이를 굴욕외교라고 비판하는 여론이 악화되었다. 그 결과 1964년부터 학생과 야당을 중심으로 흔히 ‘6.3항쟁으로 불리는 격렬한 반대가 계속되었고, 이를 진압하기 위해 계엄령이 선포되기까지 했다. 이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19656월 한국과 일본의 국교를 정상화하는 한일협정이 조인되었다. 이로써 박정희 정권은 일본 자본에 근거한 경제개발을 본격적으로 추진할 수 있었다.

한일협정 체결과 아울러 박정희 정권의 경제개발 자금 획득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이 베트남전쟁 파병이었다. 당시 베트남은 한국처럼 남과 북으로 갈려 북에는 공산정권이, 남에는 반공정권이 들어서 있었다. 그런데 남베트남에서는 오래전부터 북베트남과 연결된 베트콩이라는 반정부세력이 남베트남 정부를 상대로 지속적인 게릴라전을 벌였다. 결국 남베트남의 반공정권을 지키기 위해 이 전쟁에 미국이 개입하였고, 여기에 한국도 함께 동참한 것이었다.

1964년 처음 파병할 때부터 1973년 철수할 때까지 한국군 총 32만여 명이 파병되었다. 베트남전쟁 파병은 미국에서 지급되는 파병 장병들의 봉급, 파병의 결과 한결 유리해진 한국 기업의 베트남 진출, 미군을 상대로 한 물품 납품 등을 통해 한국이 경제개발에 필요한 외화를 획득하는데 큰 도움을 줬다. 그러나 다른 나라의 내전에 반공경제를 명분으로 미국을 따라 개입한 것이 과연 정당한 일이었는지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다. 한국군 병사들의 봉급도 다른 나라 병사들보다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었다. 무엇보다 이 전쟁에서 약 5천명의 한국군이 사망했고 1만여 명이 부상당했으며, 고엽제에 의한 2만여 참전군인들의 피해와 고통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한일협정 체결과 베트남전쟁 파병을 밀어붙인 박정희 대통령은 19675월에 치러진 제6대 대통령 선거에 여당인 공화당 후보로 다시 출마하였다. 새롭게 통합된 야당인 신민당 대통령 후보로는 4년 전과 같이 윤보선이 출마하였다. 그러나 박빙의 승부였던 4년 전 제5대 대통령선거와는 달리 1967년 선거는 박정희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났다. 그것은 지난 4년 간 경제가 급속히 성장하면서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대중적 지지도가 올라갔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대통령선거 1달 후 19676월에 치러진 국회의원선거에서는 박정희 정권이 광범위한 부정을 저질렀다. 경제성장을 통한 지지도 상승으로 굳이 부정선거를 할 필요가 없었음에도 박정희 정권이 이와 같은 무리수를 둔 이유는 개헌에 필요한 재적 2/3 이상의 의석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즉 당시 헌법에 따르면 대통령은 4년 임기의 대통령직을 딱 2번까지만 할 수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63년에 이어 1967년에 다시 대통령에 당선되었기 때문에, 당연히 다음 선거인 1971년 대통령선거에는 출마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은 계속 권력을 유지하고 싶었다. 그래서 국회에서 헌법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뜯어고치기 위해 절대 다수 의석을 목표로 부정선거를 저지른 것이다. 당연히 부정선거에 대한 학생과 야당의 반발과 저항이 거셌지만, 결국 박정희 정권과 공화당은 이 선거에서 재적 2/3을 훨씬 넘긴 의석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압도적인 의석을 바탕으로 196911월 마침내 대통령의 3선 출마를 허용하는 ‘3선개헌을 단행하였다. 이로써 박정희 대통령은 1971년 대통령선거에 출마할 수 있게 되었다.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의 박정희 후보와 맞붙은 야당 신민당의 후보는 김대중이었다. 김영삼과 함께 ‘40대 기수론을 주장하며 인기를 모은 김대중 후보는, 만약 이번 선거에서 박정희가 또다시 대통령에 당선되면 앞으로 박정희가 영구집권을 하는 총통제와 같은 체제가 들어설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에 박정희 후보는 이번이 마지막 출마라는 점을 국민들에게 약속했다. 선거결과 95만표 차로 박정희 후보가 승리했으나, 당시부터 금권과 관권 동원 등 다양한 선거부정이 지적되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선거전 당시 김대중 후보의 경고가 불과 1년만에 현실화되었다는 데 있었다. 이제 한국의 민주주의는 큰 시련을 맞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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