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design your brain

박정희 시대의 빛과 그림자 - 민주화와 산업화 문제를 중심으로, 유신체제, 긴급조치로 지탱되다 (1970년대 정치) 본문

읽고 또 읽고/역사

박정희 시대의 빛과 그림자 - 민주화와 산업화 문제를 중심으로, 유신체제, 긴급조치로 지탱되다 (1970년대 정치)

bangla 2017. 4. 20. 09:15
728x90

박정희 시대의 빛과 그림자 - 민주화와 산업화 문제를 중심으로



오제연(성균관대)


유신체제, 긴급조치로 지탱되다 (1970년대 정치)

 

박정희 대통령은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하기는 했지만, 그 당시 국내외 정세는 매우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먼저 국제정세를 보면, 그동안 지속된 자유진영공산진영사이의 냉전이 완화되면서 본격적인 데탕트’(긴장완화) 시대가 열렸다. 특히 미국과 중국의 관계가 개선되었다. 1971년 미국과 중국 대표팀의 탁구 시합, 핑퐁외교통해 교류의 물꼬를 튼 양국은, 1972년 미국의 닉슨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함으로써 화해를 위한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했다.

미국과 중국의 화해 분위기 속에서 이미 1969닉슨독트린을 통해 베트남전쟁에서 점차 손을 떼는 등 아시아에 대한 군사적 개입을 줄이고자 했던 미국은, 한국의 박정희 정권에게도 북한과의 화해를 촉구했다. 이에 남과 북 사이에 적십자회담과 고위층의 상호비밀방문이 성사되면서, 마침내 197274자주적’, ‘평화적’, ‘민족대단결이라는 3원칙을 바탕으로 한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었다. 이와 같은 국제정세와 남북관계의 변화로 말미암아 반공이데올로기에 의존하고 있던 박정희 정권은 상당한 동요를 보이게 되었다.

게다가 국내적으로는 1960년대 말부터 과잉중복투자로 인한 기업의 부실이 확대되는 등 경제도 문제가 생겼다. 또 저임금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던 노동자들의 고통이 커지면서 1970년 전태일 분신사건이 일어났고, 1971년에는 열악한 거주환경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한 시민들의 분노가 폭발한 광주대단지사건이 발생하는 등 대중들의 분만과 항거도 더욱 거세지고 있었다. 결국 박정희 대통령은 급박하게 돌아가는 국내외 정세에 대처하고, 동시에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고 연장하기 위해 매우 폭력적인 방법을 사용하였다.

 

19721017일 박정희 대통령은 갑자기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헌정질서를 중단시켰다. 그런 다음 국회를 해산하고 모든 정치활동을 금지시켰다. 그리고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폭압적이고 독재적인 체제라 할 수 있는 유신체제를 수립하였다. 이는 1975년에 끝날 예정인 자신의 권력을 무한정 연장시켜 영구집권을 달성하기 위한 헌정질서 파괴 행위로, 쿠데타나 다름없었다.

유신 선포 1달 후 새로 채택된 유신헌법에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독재적인 내용들이 많이 들어있었다. 먼저 대통령의 임기를 6년으로 늘리고, 더 이상 국민들이 대통령을 직접 뽑지 못하도록 했다. 대신 통일주체국민회의라는 조직을 만들어 이 조직의 대의원들만이 대통령을 뽑도록 했다. 그런데 통일주체국민회의의 대의원은 대부분 각 지역의 통장과 반장 등 정부의 절대적인 영향력 아래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즉 박정희 대통령은 더 이상 전 국민을 상대로 야당후보와 치열하게 경쟁하는 피곤하고 번거로운 선거를 피해, 자신의 절대적인 영향력 아래에 있고 통제하기 쉬운 소수의 사람들만 가지고 요식적인 선거를 치르고자 했던 것이다. 실제로 유신헌법에 의해 197212월에 치러진 제8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체육관에 모인 약 2,500명의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의 99.9%의 지지로 임기 6년의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당시 사람들은 이러한 하나마나한 선거를 가르켜 체육관선거라고 불렀다.

뿐만 아니라 유신헌법 아래서 대통령은 국회의원의 3분의 1을 임명할 수 있었다. 형식적으로는 대통령이 국회의원의 3분의 1을 추천하면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인준하는 과정을 거치도록 되어있었으나, ‘통일주체국민회의에 대한 정부의 절대적인 영향력을 고려하면 실질적으로 대통령이 임명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이는 행정부와 입법부, 사법부를 엄격히 분리하여 상호 견제하도록 하는 삼권분립의 민주적 원리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었다. 여기에 더하여 나머지 국회의원 3분의 2 중에서도 절반 이상을 여당인 공화당이 장악함으로써, 유신체제 하의 국회는 대통령에 의해 조종되는 로봇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무엇보다 유신헌법의 가장 문제는 대통령의 연임에 대한 제한 조항이 완전히 삭제되었다는 데 있었다. 대개 한 사람이 대통령을 할 수 있는 회수를 1~2번 정도로 제한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유신헌법 직전에도 ‘3선개헌이 있었지만 그 회수가 3번으로 제한된 바 있었다. 그러나 유신헌법은 이러한 연임 제한 조항을 완전히 삭제함으로써, 이제 박정희 대통령은 10번이든 100번이든 회수에 상관없이 얼마든지 자유롭게 대통령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한마디로 영구집권의 길이 열린 것이다.

 

유신체제는 누가 봐도 비민주적이고 독재적인 체제였지만, 박정희 정권의 폭력 앞에 국민들은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야당이나 학생들도 처음에는 제대로 저항하지 못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유신헌법을 민주적인 헌법으로 바꿔야 한다는 목소리가 조금씩 나오기 시작했다. 특히 1973년 하반기부터는 학생들의 시위와 개헌을 위한 서명운동이 전개되었다. 유신체제에 대한 저항이 여론의 지지를 받으면서 확산되자 박정희 정권은 이를 탄압하기 위해 긴급조치를 발동하였다. 먼저 197418일 발동된 긴급조치 1호는 유신헌법을 반대하면 영장없이 체포하여 군법회의에서 1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도록 되어 있었다. 유신헌법을 비판하거나 반대만 해도 무조건 군대로 끌고 가 15년 동안 가둬버릴 수 있는 무시무시한 내용이었다.

하지만 긴급조치가 내려진 상황 속에서도 유신체제에 저항하는 민주화운동은 그치지 않았다. 19744월에는 유신체제에 저항하는 많은 학생들이 전국민주청년학생연맹(민청학련)’이라는 전국적 단위의 학생운동조직을 만들다가 적발당한 사건이 발생했다. 민청학련 사건으로 1천명이 넘게 검거되고, 주도 학생들은 법원에서 사형이나 무기징역 같은 가혹한 형벌을 선고받았다.

특히 몇몇 인물들은 민청학련의 배후 조직인 인민혁명당(인혁당)’을 만들었다는 이유로 체포하여 그 중 8명이 실제로 사형을 당했다. 197548일 대법원은 이들 8명에게 사형을 선고했는데, 형이 확정된 지 불과 하루도 지나지 않은 49일 이들은 모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인혁당 관련자들을 이렇게 신속하게 모두 사형에 처한 것은 유신체제에 저항하는 세력들에게 공포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가혹한 조처였다. 하지만 실제로 당시 인혁당은 존재하지도 않았고 모든 혐의는 박정희 정권에 의해 조작된 것에 불과했다. 한마디로 법을 이용하여 무고한 사람들을 희생시킨 전형적인 사법살인이었던 것이다. 한참 세월이 흘러 2007년 대법원은 인혁당 관련자 전원에게 무죄를 선고하여 과거 자신들이 저지른 잘못을 바로잡았지만, 이미 너무 늦어버린 후였다.

민청학련 사건과 인혁당 관련자 사형 이후에도 유신체제에 대한 저항운동이 계속되자 박정희 정권은 긴급조치의 결정판이라 할 수 있는 긴급조치 제9호를 발동했다. 1975513일 발동된 긴급조치 9호는 이전까지 모든 긴급조치의 종합완결판이었다. 유신헌법에 대한 그 어떠한 비판도 금지시켰으며 긴급조치를 비난하는 것까지 처벌대상으로 삼았다. 긴급조치 9호는 1979년 박정희 정권이 무너질 때까지 계속 효력을 유지하면서 무수히 많은 사람들을 감옥을 가게 만들었다.

 

1970년대 후반으로 가면서 박정희 체제는 점점 더 경직되어갔다. 그러나 유신체제에 대한 자그마한 반대도 용납하지 않는 철권통치가 강화될수록 국민들의 반발심도 비례하여 커졌다. 이러한 민심이반은 유신체제의 종말을 앞당겼다. 유신체제의 종말은 197812월의 국회의원 선거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국회의원 선거에 앞서 같은해 7월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는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에 의한 간접선거를 통해, 즉 체육관선거를 통해 박정희 대통령이 6년 전처럼 99.9%의 지지로 다시 당선되었다. 그러나 국민들이 직접 투표하는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야당인 신민당이 전체 득표율에서 여당인 공화당에 1.1% 앞서는 놀라운 결과가 나왔다. 유신체제와 같은 억압적인 분위기 속에서도 야당이 여당보다 더 많은 표를 얻은 선거 결과는, 이미 민심의 이반이 매우 광범위하게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줬다.

이렇게 박정희 정권이 민심으로부터 멀어지는 가운데 박정희 정권을 몰락으로 이끈 결정적 사건이 발생했다. 그것이 바로 부마항쟁이었다. 19791016일 부산대학교 학생들의 시위로 시작된 부마항쟁은 삽시간에 부산시는 물론 마산까지 확산되었다. 부산대생들은 유신헌법 철폐’, ‘야당탄압 중지’, ‘빈부격차 해소등의 구호를 외치면서 가두시위를 벌이기 시작했고 다음날에는 일반 시민들까지 적극 합류하여 경찰서, 파출소, 신문사 등을 공격하였다. 17일에도 시위가 계속되어 KBS, MBC, 동양TV, 경남도청과 함께 부산시내 파출소 23개소가 파괴되었다. 이에 박정희 정권은 18일 부산지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공수부대 5천 명을 투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018일 시위는 마산지역으로까지 확산되었다. 경남대 학생 1천여 명이 경찰과 투석전을 벌인 것으로 시발로 3.15의거탑에서 독재타도’, ‘박정권은 물러나라등의 구호를 외치며 연좌농성에 돌입했다. 해가 지면서 마산시민은 물론 마산 수출자유지역의 노동자 등의 합세로 시위규모는 더욱 커졌다. 결국 1020일에는 마산창원 일대에도 위수령이 내려지고 군대가 투입되었다.

부마항쟁 직후인 19791026일 청와대 부근에 있는 중앙정보부 안가에서 요란한 총성이 울렸다. 이것이 유명한 ‘10.26사건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심복 중의 심복이라 할 수 있는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 박정희 대통령을 쏘았다. 이로써 유신체제는 물론 19615.16군사정변 이후 18동안 지속된 박정희 정권은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10.26사건의 직접적 원인은 민심이반에 따른 지배층 내부의 갈등이었다. 청와대 경호실장 차지철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갈등은 결국 박정희 대통령 암살이라는 극단적 상황으로까지 치달았던 것이다. 차지철은 계속해서 탄압 일변도의 강경책을 주장한 반면, 김재규는 부마항쟁에 학생뿐만 아니라 시민, 노동자 등 민중들이 대거 가담하고 있기 때문에 유화책을 모색해야 된다고 판단했다. 한마디로 유신체제에 대한 저항의 격화로 정권의 위기가 닥치자 지배층 내부의 작은 차이가 점점 더 커지게 되어 극단적 분열로까지 연결된 것이었다. 그런의미에서 10.26사건도 유신체제의 가혹한 탄압에 굴하지 않고 끈질기게 전개된 민주화운동의 결과라 할 수 있다. 폭압적인 유신체제조차도 민주주의를 향한 국민들의 열망을 완전히 억압할 수는 없었고 결국 비극적 종말을 맞게 되었다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