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design your brain

박정희 시대의 빛과 그림자 - 민주화와 산업화 문제를 중심으로, ‘한강의 기적’이 일어나다 (1960년대 경제) 본문

읽고 또 읽고/역사

박정희 시대의 빛과 그림자 - 민주화와 산업화 문제를 중심으로, ‘한강의 기적’이 일어나다 (1960년대 경제)

bangla 2017. 4. 20. 09:16
728x90

박정희 시대의 빛과 그림자 - 민주화와 산업화 문제를 중심으로



오제연(성균관대)


한강의 기적이 일어나다 (1960년대 경제)

 

1960~70년대 박정희 정권 하의 정치는 군사정변으로 시작하여 유신체제로 마무리되는 독재의 길을 걸어갔다. 그러나 같은 시기의 경제는 한강의 기적이라고 불리는 본격적인 고도성장의 길에 접어들었다.

19615.16군사정변으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은 이미 이승만, 장면 정권 당시 수립되어 있던 경제개발계획을 토대로 본격적인 경제개발에 나섰다. 1962년부터 5년 단위로 계속 추진된 '경제개발5개년계획'1960~70년대 연평균 10% 경제성장이라는 놀라운 결과를 만들어 냈다. 경제성장의 속도만큼 근대화의 속도도 빨라서, 서구 사회가 수백 년 동안 이뤄낸 것들을 한국은 불과 수십 년 만에 달성하였다. 이러한 압축근대화로 인해 한국 사회의 모습은 빠르게 변해갔다.

이러한 고도성장이 가능했던 원인 중 하나는 국가(정부)가 강력한 힘을 가지고 경제를 주도했기 때문이었다. 앞서 언급한대로 정부는 경제개발을 위한 장기적이고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을 뿐만 아니라, 이 계획이 제대로 실행될 수 있도록 모든 정책적 수단과 강제력을 동원하여 기업이나 가계, 노동자들을 통제했다. 덕분에 한국 경제는 군사작전처럼 효율적으로 앞으로 나아갔고 성장의 속도도 그만큼 빠를 수 있었다. 정부의 강력한 리더십은 분명 한국 경제성장의 원동력이라고 할 수 있다.

국가주도의 1(1962~1966)2(1967~1971) 경제개발계획을 거치면서 한국의 경제는 매우 빠른 속도로 성장하였다. 1962239달러에 불과했던 1인당 GNP1971437달러로 2배 가까이 늘어났고 국민총생산은 196223억 달러에서 197195억 달러로 무려 4배 이상 늘어났다. 이 기간 동안의 연평균 경제성장률은 9%가 넘어 매우 높은 수준이었다. 수출도 대폭 늘어나 19638천만 달러에 불과했던 것이 19711132백만 달러로 증가되었다. 이 시기를 거치면서 현대자동차(1967), 포항제철(1968), 삼성전자(1969), 현대중공업(1972) 등 굴지의 대기업이 창립되었고 경인고속도로, 경부고속도로 등이 건설되었다. 여천과 울산에는 석유화학단지가 만들어졌고 구로공단, 마산공단 등이 조성되는 등 한국사회는 본격적인 공업화의 길로 접어들었다.

해외에서 자본과 기술, 그리고 시장을 확보할 수 없었다면 한국의 고도성장은 꿈도 꿀 수 없었을 것이다. 정부의 이른바 수출드라이브정책은 이러한 해외 요소들을 기반으로 이루어졌다. 1962년 경제개발계획이 처음 만들어졌을 때만해도 경제성장의 목표는 균형성장과 내포적 공업화, 즉 여러 산업을 균형있게 발전시켜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외부에 의존하지 않고 직접 만들어 쓰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미국은 이러한 목표가 현실성이 없다고 비판하면서 한국 정부에 대외지향적 경제구조를 갖출 것을 요구했다. 즉 경제개발을 위해서는 자본, 원료, 기술 등이 필요한데 한국의 경우 이를 모두 외국에서 빌릴 수밖에 없으며, 그 대가를 달러로 지불하기 위해서는 결국 국제시장에서 요구하는 물건들을 만들어서 수출을 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물건을 팔기에는 좁은 국내 시장보다 넓은 해외 시장이 훨씬 유리했다. 결국 1964년부터 중반 박정희 정권은 경제개발의 방향을 대외지향적으로 수정했고, 이후 한국은 수출중심의 국가로 거듭났다. 덕분에 한국은 많은 달러를 벌어들여 경제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

한국 제품의 수출이 잘 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한국 제품이 다른 나라 제품들에 비해 가격경쟁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극심한 경쟁 속에서 시장에 상품을 내다팔려면 무언가 장점이 있어야 했다. 당시 한국이 가지고 있던 유일한 장점은 풍부한 저임금 노동력에 기반한 가격경쟁력이었다. 기술과 자본, 경험 등 거의 모든 요소가 부족했던 한국이 유일하게 내세울 수 있는 장점이 값싸고 풍부한 노동력이었던 것이다. 인구밀도도 높았고, 또 해방 이후 교육이 대폭 확대되면서 일정한 교육을 받은 수많은 양질의 노동력이 양산되었다. 그래서 1960년대 경제성장은 노동집약적 경공업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가장 대표적인 산업은 섬유산업이었다. 옷감이나 옷을 만드는 산업인 섬유산업은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하면서도 비교적 적은 자본과 낮은 기술수준으로도 충분히 운영할 수 있는 산업이었다. 섬유산업 이외에도 신발산업과 가발산업 등이 당시 한국 경제를 이끌었던 주력산업이었다.

 

그러나 수출드라이브에 기반한 경제성장은 많은 문제점도 만들어냈다. 먼저 대외의존적 경제구조가 만들어졌다. 일례로 제조업 투자액 가운데 외자(외국자본)의 비중은 196210% 정도였으나 1968년에는 무려 69.1%로 늘어났다. 외자 중심으로 경제개발을 함으로써 수출은 물론 수입도 대폭 늘어났다. 경공업(음식료, 섬유 제외)의 수입의존도는 196015%에서 197023%로 늘어났고, 화학은 25%에서 31%, 금속기계공업은 15%에서 32%로 늘어났다. 돈을 빌려주는 나라 상당수가 자기 나라 제품을 살 것을 요구하였기 때문이었다. 대외의존은 자본뿐만 아니라 기술, 시장으로까지 확대되었다. 경제개발에 필요한 대부분의 기술은 해외에서 비싼 로열티를 물면서 들여온 것이었고, 또 상품을 내다 파는 곳도 대부분 해외시장이었다. 이러한 지나친 대외의존적 경제구조 때문에 한국 경제는 세계경제가 조금만 나빠져도 큰 위기에 빠지는 취약성을 갖게 되었다. 미국 경제가 기침을 하면 한국 경제는 독감에 걸린다는 말도 여기서 나왔다.

또한 대외의존적 경제개발로 인한 수입증대는 무역적자로 이어졌다. 경상수지 적자는 19663억 달러에서 197110억 달러로 대폭 늘어났다. 수출액 중에서 갚아야 할 원금과 이자가 차지하는 비중도 19666.2%에서 197031.4%로 대폭 증가되었다. 한마디로 당시 한국 경제는 수출을 통해 해마다 더 많은 돈을 벌어들였지만 빚(외채)도 그만큼 계속 늘어갔으며, 빚을 갚아야 할 부담 역시 갈수록 커져만 갔던 것이다. 훨씬 이후의 이야기지만 1997년에 발생한 ‘IMF금융위기는 한국이 막대한 외채를 제때에 갚을 수 없는 상태가 되는 바람에 발생한 국가부도위기였다. 그런 의미에서 ‘IMF금융위기1960년대 이후 본격화된 대외의존적 경제개발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대외의존적의 경제개발은 수출기업들에게는 매우 좋은 기회였다. 정부가 수출기업에 각종 특혜를 베풀었기 때문에 수출기업들은 손쉽게 돈을 벌 수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대출특혜였다. 수출을 잘하는 기업에게는 정부가 6~12%의 저리로 자금을 빌려주었는데, 당시 은행의 이자가 보통 20% 이상이었기 때문에 이 돈을 은행에 그냥 저금만 해두어도 막대한 이자 차익을 챙길 수 있었다. 게다가 해외에서 들여오는 공공차관의 경우 이자가 2~5%밖에 안 되었기에 그 특혜는 더욱 컸다. 이러한 특혜자금의 일부는 정치권 및 정부에 다시 불법 정치자금으로 흘러들어가 정경유착의 검은 고리를 형성하기도 하였다. 이 과정에서 대기업들은 정치권 및 정부와 밀착되어 각종 특혜를 받아 문어발식으로 급속하게 사세를 확장하여 거대한 재벌로 성장하였다.

경제개발의 혜택도 계층적으로 매우 불공평하게 돌아갔다. 경제성장의 가장 큰 혜택은 재벌이라 불리는 대기업, 대자본가에게 돌아갔고 노동자들은 장시간 노동과 저임금에 시달렸다. 1960년부터 1969년까지 노동자 임금의 연평균 상승률은 연평균 경제성장률 9%에 훨씬 못 미치는 3.4%에 그쳤다. 노동자들의 노동시간도 엄청나게 늘어나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196348시간가량이던 1주당 노동시간은 1969년 무려 57.2시간으로 10시간 가까이 늘어났다. 노동조건도 매우 열악했다. 봉제공장이 밀집해있던 청계천 일대에서는 한 층을 두 개 층으로 나누어 허리를 피기도 힘든 작업장을 흔히 볼 수 있었다. 환풍기도 없는 작업장에서 노동자들은 엄청난 먼지에 시달려야 했고 폐결핵 환자가 속출했다. 그러나 열악한 노동조건은 경제성장이라는 화려함 속에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할 경우 불순분자나 빨갱이로 몰리기 쉬웠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9701113일 청계천 평화시장의 공장에서 일하던 청년 노동자 전태일은 노동조건 개선과 근로기준법 준수를 요구하며 스스로 몸을 불살라 목숨을 끊었다. 스스로 자기 몸을 불사를 만큼 당시의 노동조건은 너무나 열악했던 것이다. 하지만 전태일의 분신은 열악한 노동조건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환기시켜, 이후 조금씩 노동조건이 개선되고 노동운동이 활성화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중화학공업화와 새마을운동 (1970년대 경제)

 

1차 경제개발계획(1962-1966)은 연평균 7.9%의 성장을 이룩했고 제2차 경제개발계획(1967-1971)은 연평균 9.7%의 성장률을 기록했다. 그러나 1960년대의 경제개발은 주로 경공업을 위주로 이루어졌다. 반면 중화학공업은 아직 걸음마 단계에 불과했다. 2차 경제개발계획 기간 중에는 포항제철이 기공되는 등 중화학공업화가 부분적으로 이루어지기도 했지만, 본격적인 중화학공업의 발전은 제3차 경제개발계획(1972~1975)과 제4차 경제개발계획(1977~1981) 기간에 이루어졌다.

1972년 시작된 3차 경제개발계획은 산업구조의 고도화, 국제수지의 개선, 식량자급, 지역발전의 균형 등을 목표로 시작되었는데, 특히 제철, 비철금속, 전자, 기계, 조선, 화학 등 6개 중화학공업 분야에 집중 투자가 이루어졌다.

중화학공업화 정책은 크게 세 가지 이유로 추진되었다. 먼저 일본 등 선진국의 사양산업 이전이 필요했던 사정이 있었다. 특히 일본은 전후 복구를 끝내고 고도 경제성장을 이룩하게 되자 점차 첨단산업으로 산업의 중심을 옮기면서, 과거 자신들이 운영했던 노동집약적인 중화학공업을 한국과 같은 후진국에 이전하고자 하였다. , 이른바 굴뚝산업이라고 불리는 선진국의 중화학공업이 한국으로 이전되면서 한국의 중화학공업이 발전하게 된 것이었다.

두 번째로는 한국 내부의 사정이었다. 섬유 등의 경공업만으로는 지속적인 수출증대가 곤란했다. 한국은 해외 자본을 빌려와 경제개발을 하는 형편이었기에 그 돈을 갚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수출증대가 필요했다. 그러나 경공업 제품은 가격도 낮고 물량도 크지 않아 어느정도 수준에 오르면 수출증대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가격도 높고 물량도 많은 중화학공업이 필요하게 된 것이었다.

세 번째로는 방위산업 육성의 필요성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자주국방을 내세우고 총, 대포 등 각종 무기를 국산화하고자 하였다. 특히 1970년대에 들어와 미국과 중국이 화해하면서 주한미군이 일부 철수하게 되자 한국정부는 그 공백을 메꾸기 위해 자주국방을 내세우게 되었다. 자주국방을 하기 위해서는 중화학공업이 반드시 필요했다. 총과 대포, 탱크 등을 만들기 위해서는 제철, 기계, 비철금속, 조선 등의 중화학공업을 통해서만 가능했던 것이다.

중화학공업화는 19731월 대통령 연두 기자회견에서 중화학공업화를 선언하면서 본격화되었다. 이어 5월에는 중화학공업추진위원회가 신설되고 그 밑에 실무기관으로 중화학공업추진위원회 기획단을 설치하였다.

중화학공업화는 한국의 산업구조를 획기적으로 바꿨다. 중화학공업화를 통해 한국경제는 제철, 자동차, 조선 등 대규모 산업을 발전시킬 수 있게 되었다. 현대자동차, 포항제철, 삼성전자, 현대중공업 등은 이러한 중화학공업화 정책의 결과 급속한 성장을 거듭하여 오늘날 세계적인 기업으로 발돋움했다.

 

그러나 중화학공업화는 여러 가지 문제도 파생시켰다. 가장 큰 문제는 과잉중복투자였다. 세계시장의 동향이나 국내 소비시장에 대한 면밀한 고려없이 정부는 중화학공업화를 밀어붙였고, 기업들은 정부의 지원과 특혜를 기대하며 무분별하게 사업에 뛰어들었다. 1970년대 중반까지는 그런대로 괜찮았지만 1970년대 후반으로 가면서 중화학공업은 큰 위기에 직면했다. 중화학공업 제품은 주로 수출에 의존했다. 국내에서는 아직 대규모의 중화학공업 제품이 소비될 정도로 경제규모가 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예컨대 자동차를 만들어도 국내에서는 살 사람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대부분 수출에 의존했던 것이다. 그러나 1978년 제2차 석유파동이 일어나면서 세계경제가 크게 위축되자 중화학공업 제품의 수술은 대단히 어럽게 되었다. 이미 과잉중복투자로 몸살을 앓고 있던 한국의 중화학공업은 석유파동으로 큰 타격을 입고 많은 기업들이 거의 부도 직전까지 몰렸다. 20년 동안 고공행진을 거듭하던 경제성장율도 1979년부터 급속히 떨어져 1980년에는 최초로 마이너스 성장, 즉 경제후퇴까지 발생하였다. 이에 또다시 정부가 개입하여 중화학공업에 대한 구조조정에 착수하였다. 정부는 경영난에 처한 민간기업 일부를 국유화하거나 기업간의 합병을 유도하여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대책에도 불구하고 중화학공업은 상당히 오랫동안 침체국면을 벗어날 수 없었다.

 

1960년대 이후 급속한 공업화는 도시화로 연결되었다. 공업화 자체가 도시 중심으로 진행되기도 했고 또 공업화를 통해 농촌지역이 도시지역으로 탈바꿈하기도 했다. 즉 산업화와 도시화는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었고 그에 따라 산업화의 혜택도 주로 도시에 주어졌다. 반면 농촌의 삶은 도시에 비해 매우 곤궁해졌다. 특히 정부의 저곡가정책은 농촌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수출중심의 산업화 정책에 따라 세계시장에서 경쟁력있는 제품을 만드는 것이 중요했는데, 당시 한국에서 경쟁력을 갖춘 것은 가격밖에 없었다. 상품가격을 싸게 매기기 위해서는 노동자들에게 임금을 적게 주어야 했고, 적은 임금으로도 노동자들이 살아갈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노동자의 삶에 있어 가장 중요한 식량, 즉 쌀값을 싸게 만들어야 했다. 따라서 저곡가정책은 한국 제품의 가격경쟁력 확보를 위한 전제조건이 되었다. 이는 한국의 경제성장이 농촌의 희생을 전제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따라서 경제성장에도 불구하고 갈수록 힘든 삶을 살아가는 농민들의 불만은 커질 수밖에 없었다. 박정희 정권으로서는 농민과 농촌을 안정시키기 위한 대책이 시급했다. 특히 농촌은 박정희 정권의 주요한 표밭이었기 때문에 농민의 지지를 계속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무언가 대책이 절실했다.

한편으로는 국내외 건설경기가 부진해지면서 남아도는 시멘트가 큰 문제였다. 60년대를 거치면서 시멘트 생산능력은 엄청나게 늘어났는데 건설경기 부진으로 이를 소화할 수 없게 되어 시멘트가 남아도는 상황이었다. 이에 정부에서는 피폐해진 농민들의 생활여건을 개선하면서 동시에 남아도는 시멘트를 소화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였다. 이것이 새마을운동을 시작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새마을 운동은 1970422일 가뭄대책을 논의하기 위하여 소집된 지방장관회의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수재민 복구대책과 아울러, 넓은 의미의 농촌재건운동에 착수하기 위하여 자조·자립정신을 바탕으로 한 마을가꾸기 사업을 제창하고 이것을 새마을가꾸기운동이라 부르면서 시작되었다.

새마을 운동은 크게 마을가꾸기 사업과 소득증대 사업 그리고 정신개발 운동 등으로 구분되었다. 마을가꾸기 사업은 농촌의 지붕개량, 변소개량, 마을길 넓히기 등의 사업을 말하는 것이고 소득증대 사업은 농민들의 각종 소득증대를 위한 사업을 말한다. 정신개발은 농민들의 정신자세를 바꾸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 중에서 비교적 가시적인 성과를 거둔 것은 마을가꾸기 사업이었다. 비교적 사업도 쉬웠고 또 사업을 시행하면 금방 효과가 났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농촌마을에서 초가집도 사라지고 마을길도 시멘트로 닦여 넓어지는 등 마을 겉모습은 크게 바뀌었다.

그러나 소득증대 사업은 성과가 신통치 않았다. 아무리 농민들이 노력을 해도 도시 중심의 산업을 따라갈 수 없었다. 일부 마을에서 특용작물을 재배해 높은 수익을 올리는 경우도 있었으나 그것은 소수에 불과했다. 또 정부가 농민에게 벼를 수매할 때는 높은 가격으로 사고 수매한 벼를 시장에 팔 때는 싼 값에 파는 이중곡가제가 시행되면서, ‘저곡가정책으로 농민들이 입는 피해가 경감되고 농민들의 소득이 어느정도 상승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렇다고 농촌의 생활수준이 획기적으로 나아진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정부는 정부지원보다 농민들의 자발적인 노력을 강조했다. 즉 지붕개량이나 마을길 넓히기 등의 사업도 정부가 지원하는 것은 일부였고 나머지는 농민들이 부담해야 했다. 특히 마을길 넓히기 사업의 경우 농민들의 토지가 수용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어떠한 보상도 없이 반강제적으로 농민들에게 토지를 내놓도록 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방침으로 인해 농민들이 새마을운동을 기피하는 사례도 있었다.

이렇듯 1970년대 정부 주도로 새마을운동이 대대적으로 추진되었고 그래서 일정한 성과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농촌문제는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못했다. 농촌 사람들은 살기 어려운 농촌을 떠나 계속해서 도시로 도시로 빠져나갔다. 그 결과 농촌의 인구는 크게 감소했으며, 특히 젊은 사람들이 농촌을 많이 떠나 거의 모든 농촌마을에서 농민들의 평균연령은 60~70대로 올라갔다. 이는 곧 새마을운동이 농촌문제를 해결하는데 한계가 있었음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었다.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