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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6.25전쟁), 미국, 소련, 중국의 대한정책, 민간인 집단 학살, 부역자 처벌, 북한군의 점령 정책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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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6.25전쟁), 미국, 소련, 중국의 대한정책, 민간인 집단 학살, 부역자 처벌, 북한군의 점령 정책

bangla 2017. 3. 22. 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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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6.25전쟁)

 

1. 한국전쟁의 배경

 

1) 미국, 소련, 중국의 대한정책

미국은 한국 정부 수립 이후 1949년 군사고문단만 남기고 철수하였다. 그러나 미군 철수가 한반도에 대한 미국의 무관심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미국은 동북아 지역에서 소련의 팽창을 저지하기 위해 일본의 역할을 강조했다. 여기에 1949년 중국 혁명이 성공하게 되면서 일본의 역할은 더욱 중요해졌고 한국은 일본의 강화를 위해 필수적인 지역으로 설정되었다. 즉 한국은 일본의 안보적 전초기지이자 경제적 후방기지 역할을 부여받았다. 미국의 이러한 정책은 흔히 지역통합전략으로 불린다. (null)

미국은 한국전쟁 발발에 중요한 요인이 된 것으로 꼽히는 소위 애치슨 라인을 발표하였다. 1950112일 당시 미 국무장관이었던 딘 애치슨은 전미신문기자협회에서 행한 아시아에서의 위기라는 연설에서 태평양에서의 미국의 방위선을 알류샨열도-일본-오키나와-필리핀을 연결하는 선으로 정한다고 발언하였다. 애치슨 라인은 미국의 군사비 절감을 위한 도서방위전략의 일환이었지만, 소련과 북한 등 공산권에 한반도 전쟁 시 미국의 지상군 개입 가능성이 낮다는 메시지를 줄 수 있었다.

한편 미국은 한국에 대한 군사원조를 제한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이승만 정권에 대한 미국의 통제력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 이승만 정권은 공공연하게 북진통일을 외치면서 무력전쟁 가능성을 공언하고 있었다. 이에 미국은 이승만 정권이 미국의 통제력을 벗어나 독자적으로 전쟁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지 못하도록 한국에 대한 군사원조를 억제하려 했다.

소련은 미국과 대립하는 것을 피하고자 하였고,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하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1949년 중국 혁명이 성공하고 소련이 원자폭탄을 개발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소련은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도 별로 손해 볼 것이 없다고 판단했다. 소련은 공식적으로 전쟁에 개입하지 않으면서 북한이 승리하면 소련의 덕분이라고 선전하고, 패배하면 소련이 개입하지 않았기에 진 것이라고 강변할 생각이었다. 결국 소련은 김일성의 전쟁 승인 요청을 거부하다가 1950년도 들어 전쟁에 동의하였다. 또한 미국의 개입을 예상하면서 북한이 중국으로부터 전쟁 동의를 얻도록 하였다. 전쟁에 대해 적극적 입장으로 돌아서면서 소련은 19504월부터 북한에 군수 물자를 대대적으로 공급했다.

중국은 혁명이 성공한 지 불과 1년도 채 안 되는 시기였기 때문에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오랜 내전으로 지친 상태였기에 국내 상황을 정비하는 것이 더 시급한 문제였다. 그러나 중국과 북한의 지도부는 매우 끈끈한 동맹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항일 전쟁을 함께 치렀고, 국공내전에 조선인 부대가 대거 참전하였다. 또 만주 지역의 중국 홍군이 북한 지역으로 들어와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편의를 봐주기도 했다. 그렇기에 중국은 북한이 전쟁을 도와달라는 요청을 거절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북한의 존재 자체가 미국 등 적대세력으로부터 중국을 지키는 방파제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2) 남북한의 정세

이승만 정권은 정부 수립 직후부터 다양한 위기에 직면해있었다. 정부수립 직후인 194810월에는 여순사건이 터졌다. 여순사건은 국가의 가장 중요한 무장력인 군대가 반란을 일으킨 것이라는 점에서 이승만 정권이 느낀 충격은 매우 큰 것이었다. 여순사건은 제주도 게릴라 토벌작전에 출동하라는 명령을 받은 여수 주둔 국방경비대가 반란을 일으킨 것으로 9일 만에 진압되기는 하였지만 나머지 세력들이 지리산 등지로 들어가 게릴라 투쟁을 계속함으로써 커다란 위협이 되었다. 게다가 제주도에서는 여전히 게릴라 투쟁이 진행 중이었고 오대산, 태백산 등에서도 게릴라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이승만 정권은 대대적인 게릴라 토벌작전을 펼치는 한편 194912월에는 일제의 치안유지법을 본 따 국가보안법을 제정하여 정치적 반대세력을 탄압할 수단을 만들었다. 또한 학도호국단을 조직하는가 하면 일제 애국반을 그대로 물려받아 국민반을 만들어 주민들을 통제하고자 하였다. 이승만 정권이 만든 대표적인 통제조직은 보도연맹이었다. 보도연맹은 해방 이후 좌익 활동 전력이 있는 사람들을 전향시켜 가입시킨 조직이었는데,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대략 20~30만 명가량 되었다고 추정된다. 보도연맹은 한국전쟁 당시 대량 학살대상이 됨으로써 큰 문제를 일으켰다. 탄압조치와 함께 이승만 정권은 농지개혁을 단행함으로써 농민들의 불만을 체제 내로 흡수하고자 하였다. 이승만은 전격적으로 농지개혁법을 통과시키고 1950년 봄에는 농지분배 확인서를 각 농가에 배부함으로써 실질적으로 농지개혁이 시행된 것과 같은 효과를 보게 되었다. 농지개혁의 실시는 많은 농민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되어 농민들의 정부에 대한 불만이 많이 누그러진 것은 사실이었다. 농지개혁은 많은 미비점들이 있기는 했지만 전체적으로 상당히 성공적인 정책이었다.

한편 북한은 소위 민주기지론에 따라 북한지역의 혁명역량을 강화하는데 집중했다. 19489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수립하고 19496월에는 남북 노동당을 합쳐 조선노동당을 창당함으로써 체제 정비를 마쳤다. 이어서 북한은 남한의 게릴라 투쟁을 지원하기 위해 오대산 지구를 인민유격대 제1병단으로, 지리산 지구를 제2병단으로, 태백산 지구를 제3병단으로 편성하고, 강동정치학원 출신 유격대원들을 11차례에 걸쳐 내려 보냈다. 그러나 1950년 봄에 남한의 게릴라 투쟁은 거의 소멸되다시피 실패한 상황이었다.

또한 북한은 1949년 소련과 비밀 군사협정을 체결했고 중국과도 동일한 비밀군사협정을 맺어 4만 명가량의 조선의용군을 인민군에 편입시켰다. 이렇게 체제정비 및 중국, 소련관의 군사협정 등을 통해 북한은 전쟁준비를 착실히 진행시켜 나갔다. 당시 북한의 전쟁을 정당화하는 논리는 국토완정론이었다. 즉 남한 지역은 미 제국주의의 식민지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에 국토 전체의 완전한 해방을 이룬다는 것이 국토완정론의 내용이었다. 국토완정론을 내세우면서 한편으로 북한은 남한에 대한 평화공세를 펼치기도 하였다. 대표적인 것은 북한에 남아있던 조만식과 남한에서 체포된 남로당 출신의 김삼룡, 이주하를 교환하자는 것이었다.

 

 

2. 한국전쟁의 진행 과정

1950625일 이전에 38선에서 남북 간의 군사적 충돌이 빈번했다. 1949년도에만 큰 것은 대대 규모의 병력이 참가하는 전투도 있었으며 총 874회에 이르는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래서 1950625일 전쟁이 일어났을 때 사람들은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고 피난 갈 생각도 안했다. 그동안의 여느 전투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이승만 정권이 국군이 북진 중이라고 거짓말을 했기 때문에 전면 전쟁이 일어나자 인민군은 포천을 점령하고 26일 오후 1시에는 의정부를 점령한 다음 불과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하였다. 이어서 급거 파견된 미군 제24사단마저 대전에서 격파하고 7월 하순 경에는 경상도 일대를 제외한 한반도 전역을 석권하였다. 남아있는 지역은 이른바 낙동강 방어선 아래쪽의 일부 지역이었다.

전쟁 발발 소식이 전해지자 미국은 당일인 25일 곧바로 참전결정을 내리고 26일에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를 개최하여 유엔군을 구성하였다. 이때 소련의 애매한 태도는 눈여겨 볼만 했다. 당시 유엔주재 소련대표는 말리크였는데, 스탈린은 말리크에게 유엔 안보리에 참석하지 말 것을 지시했고 이에 말리크는 병을 핑계로 불참했다. 결국 거부권을 가지고 있던 소련이 불참함으로써 유엔 안보리는 미국의 독무대가 되었고 북한을 침략자로 규정하고 유엔군 파견을 결의하게 되었던 것이다. 북한을 비밀리에 지원하면서 유엔 안보리에는 의도적으로 불참하는 소련의 이중적 태도는 매우 이기적인 행태였다.

유엔군은 16개국으로 구성되었지만 실질적으로는 미국이 주도하였다. 유엔군은 공군의 98% 이상, 해군의 83% 이상, 지상군의 88% 이상이 미군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미군은 유엔군의 지휘권을 장악한 다음 1950714일에는 이승만과 대전협정을 맺어 한국군에 대한 작전 지휘권까지 확보하였다. 유엔군 사령관으로 맥아더가 임명되고 낙동강 방어선을 중심으로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지게 되었다.

전쟁 초기 서울 함락 과정에서 가장 놀라운 사실은 이승만 정권의 이해하기 힘든 행태였다. 이승만은 인민군의 서울점령 하루 전인 27일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몰래 서울을 빠져나와 도망하였다. 게다가 국군이 인민군을 물리치고 북진중이라는 거짓 방송을 녹음해 27일 밤늦게까지 틀어대고 있었다. 게다가 628일 새벽 230분에는 한강 인도교를 폭파해버려 수많은 피난민이 희생되는가 하면 서울에 남아있는 주민들의 피난길을 막아버렸다. 군 최고사령관이자 국가수반인 대통령이 몰래 도망하고 거짓방송을 틀어놓은 것도 부족해 피난길의 중요한 길목인 한강다리마저 끊어 버림으로써 이승만 정권은 수많은 자기 국민을 적의 수중에 넘겨버린 꼴이었다. 한강다리가 끊김으로써 도강파잔류파란 말이 나오게 되었다. 즉 강을 넘어 도망간 사람들은 도강파였고 남아있던 사람들은 잔류파라 부르게 되었다. 잔류파는 어쩔 수 없이 인민군에 협조할 수밖에 없었는데, 서울 수복 이후 도강파는 잔류파를 부역자라 하여 호되게 처벌했던 것이다. 이는 적반하장 같은 짓이었고 많은 사람들이 정권에 등을 돌리게 되었다.

남한의 90% 이상을 점령한 인민군은 점령지역에서 토지개혁을 비롯한 다양한 정책을 진행하였다. 아울러 당과 인민위원회는 물론이고 여성동맹, 농민동맹, 민주청년동맹 등 다양한 조직을 건설하여 지지기반을 확대하고자 하였다. 또한 전세가 불리해지자 수만 명의 청년들을 의용군이라는 이름으로 전장으로 끌고 갔다. 의용군으로 끌려간 사람들은 상당수가 반공포로가 되었다. 북한의 점령정책은 현실과 맞지 않는 것이 많았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세금징수 방법이었다. 북한은 세금을 계산하는데 정확성을 기한다고 하여 벼의 낱알을 일일이 센 다음 평균 작황을 계산해내어 세금을 매겼다. 이러한 방법은 정확할지는 몰라도 인정머리 없는 것처럼 보여 많은 사람들의 반감을 사게 되었다. 3개월 남짓한 인민군 점령 기간 동안 수많은 자의반 타의반 부역자들을 만들어내게 되어 숱한 피해자들을 양산했다.

한편 유엔군은 915일 인천상륙작전을 개시해 전세를 일거에 뒤집었다. 인천상륙작전으로 인민군은 허리가 잘린 셈이 되었고 낙동강 전선은 삽시간에 무너지게 되었다. 인민군은 변변한 전투조차 못하고 북으로 패주하기에 바빴고 일부는 지리산, 태백산 등지에서 게릴라전을 펼치게 되었다. 이때 수많은 부역혐의자들도 함께 입산하게 되어 전선이 휴전선에서 고착된 이후에도 후방의 게릴라투쟁은 매우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가장 중요한 문제는 38선 돌파였다. 중국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국군과 유엔군은 10월 초에 38선을 돌파하고 1020일에는 평양을 점령하기에 이르렀다. 괴멸상태에 있던 인민군은 패주하기에 바빴고 유엔군과 국군은 압록강변까지 진격해 올라갔다. 그러자 중국군이 개입하기 시작했다. 중국군은 야음을 틈타 얼어붙은 압록강을 몰래 건너 산악지역에 은거하고 있다 기습 공격을 가하는 전술을 채택했다. 중국군의 기습 공격 전술은 유엔군에게 엄청난 타격을 주었다. 중국의 거듭된 경고에도 불구하고 맥아더는 중국의 참전을 예상하지 못했고 무모하게 진격을 거듭했다. 보급선이 길어지고 혹독한 겨울을 만나게 된 유엔군은 중국군의 기습공격에 속수무책으로 패퇴를 거듭했다. 미국 역사상 최대의 패배를 맛보게 된 것이었다. 그 대표적인 전투가 장진호 전투였다. 장진호는 개마고원 지대 해발 1,000미터 이상 되는 고지였다. 낮에는 영하 20, 밤에는 무려 영하 30가 넘는 혹한지대였다. 중국군에 완전 포위된 미 제1해병사단과 미 육군 7사단 일부 병력은 이 전투에서 2,500명의 전사자와 5천명에 이르는 부상자를 냈다. 전체 병력 중에서 절반 이상이 사상자에 포함될 정도로 치열한 전투였다. 1950년 당시, 미국의 뉴스위크지는 진주만 피습 이후 미군 역사상 최악의 패전이라고 혹평하였고, 미군의 전사에도 역사상 가장 고전했던 전투로 기록되어 있을 정도였다.

장진호 전투 이후에도 유엔군은 패배를 거듭해 유명한 흥남철수를 거쳐 195114일에는 서울마저 내주게 되었다. 14 후퇴 무렵 맥아더는 전세가 불리해지자 원자탄 사용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압록강은 물론이고 만주 지역까지 원자탄을 사용해 폭격하자는 주장은 수많은 인명 피해는 물론이고 제3차 세계 대전도 불사하겠다는 매우 위험한 주장이었다. 결국 맥아더는 패전의 책임을 원자탄 한 방으로 만회하겠다는 속셈이었지만, 영국 등 수많은 나라들의 반대에 부딪쳐 트루먼에 의해 해임되고 말았다.

중국군의 남진은 평택-제천 부근에서 유엔군에 의해 저지되었고 3월 하순에는 문산-임진강 선에서 전선이 형성되었다. 지금의 휴전선과 거의 비슷한 전선이 형성된 것이었고 이후부터는 커다란 전선 변동이 없는 상태에서 치열한 고지쟁탈전이 전개되었다. 고지 쟁탈전 중에서 유명한 것은 백마고지, 단장의 능선, 저격능선, 펀치볼, 피의 능선, 크리스마스 고지 등이었다. 고지 쟁탈전은 아무런 의미 없는 싸움의 성격이 짙었다. 판문점에서는 휴전회담이 진행되고 있는 마당에 얼마간의 땅을 더 차지하겠다고 젊은 생명들이 죽어나갔던 것이다. 전쟁이 한창인 와중에 한국정부의 정책은 많은 문제를 드러냈다. 전시 총동원체제가 가동되었지만, 식량을 비롯한 배급은 원활하게 진행되지 못했고 민중의 삶은 고달프기 그지없었다. 게다가 14후퇴 무렵에는 적군에 이용당할 염려가 있다 하여 수십만의 청장년들을 국민방위군이라는 이름으로 후퇴시키는 정책을 취했는데, 간부진이 배급물자를 중간에 착복해먹는 비리를 저지르면서 수많은 국민방위군들이 굶어죽거나 병들어 죽는 사건이 발생했다. 결국 국민방위군 간부들이 처형되기는 했지만 희생자들의 원한이 풀릴 수는 없었다. 전시라는 조건 하에서 징집제가 실시된 것도 중요했다. 그전까지는 지원제였던 것이 의무적으로 군대에 가야되는 징집제가 됨으로써 한국사회의 병영화가 가속화되었던 것이다. 그런데다가 징집제 실시가 공평하지도 못했다. 일선에서 죽는 병사들이 죽을 때 하고 죽는데, 그 이유는 빽이 없어 일선으로 끌려왔다는 뜻이라는 말이 나돌 정도로 징집은 편파적이었다. 돈 있고 빽 있는 힘 있는 사람들은 다 빠지고 아무 힘도 없는 민중들이 가장 위험한 일선으로 징집되었던 것이다.

또한 이승만 정권은 전쟁이 한창임에도 불구하고 19525월 부산 정치파동이라는 것을 일으켰다. 원래 대통령은 국회에서 선출하는 것이었는데, 이승만은 국회에 반대세력이 많아 대통령에 재선될 가능성이 없어지자 헌법을 고쳐 직선제로 바꾸고자 하였다. 이승만 정권은 이를 반대하는 국회의원들을 강제로 버스에 태운 채 헌병대로 연행하고,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을 동원해 관제 데모를 벌이는 등의 방법으로 직선제 개헌을 관철시켰다. 관제데모는 우의마의라 하여 소나 말도 이승만의 대통령 재선을 바란다는 웃지 못할 주장까지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이렇게 하여 이른바 발췌개헌이라는 것을 통해 이승만은 대통령에 재선되었다. 이로부터 이승만 정권은 장기 독재의 길로 접어들었던 것이다.

전선이 고착되는 것과 함께 1951623일 소련의 유엔대표 말리크가 휴전을 공식 제안했고 이로부터 2년 여에 걸치는 지루한 휴전회담이 진행되었다. 휴전회담은 처음 4개월간은 휴전선 문제로, 다음 18개월은 포로교환 문제로 시간을 허비하게 되었다. 휴전선은 현 전선으로 결정되었지만, 포로교환문제는 쉽게 결론이 나지 않았다. 중국과 북한 측은 제네바 협정에 따라 무조건 자동송환을 주장했고 유엔군 측은 포로 자신의 자유의사에 따르자고 주장하였다. 자유의사에 따를 경우 남한지역에서 인민군에 의용군으로 징집된 사람들은 상당수가 송환을 거부할 것이었다. 소위 반공포로문제가 대두된 것이었다. 이승만은 휴전회담 반대 표시로 195361825천에 달하는 반공포로를 석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우여곡절 끝에 1953727일 만 3년 넘게 진행된 한국전쟁은 휴전에 도달하였다. 한국은 끝까지 휴전협정에 서명하지 않았고 휴전은 완전한 종전 평화협정이 아니라 잠시 전쟁을 중단한다는 것에 불과했다. 한반도에 진정한 평화는 아직 오지 않았던 것이다.

 

 

3. 한국전쟁의 결과와 국제적 영향

 

한국전쟁은 수많은 피해를 냈다. 수백만의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고 재산상의 피해는 말할 것도 없었다. 정부 집계에 따르면 전쟁 피해액은 30억 달러가 넘었는데, 이는 1945년부터 1961년 사이에 미국과 유엔이 한국에 원조했던 금액과 맞먹는 것이었다. 결국 전쟁으로 말미암아 한국경제는 회복하기 힘든 피해를 입었고 미국의 원조에 기대어 살아갈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미국의 원조는 한편으로는 고마운 것일 수도 있지만, 한국사회 전체가 미국에 절대적으로 의존해야 되는 상황을 만든 것이기도 했다. 전쟁의 결과는 직접 피해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현재까지도 전쟁의 상처는 아물지 않고 있다. 우선 수백만의 이산가족이 발생했다. 또 전쟁을 통해 남북한 정권은 자신의 정치적 반대파들을 제거해 나가면서 통제체제를 더욱 강화하였다. 북한의 김일성은 박헌영 등의 남로당 계열을 미제의 간첩이라는 혐의로 처형해버렸고 연안파의 중요 인물인 무정 또한 패전의 책임을 물어 제거하였다. 이승만 정권은 반공이데올로기를 앞세워 정치적 반대파들을 빨갱이라는 이름으로 제거하기도 하였다. 결국 정권에게 전쟁은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는 수단이 되었던 것이며, 애꿎은 민중들만 전쟁의 피해를 고스란히 떠안게 되었다.

이렇게 막대한 피해를 입힌 한국전쟁은 과연 어떤 전쟁이었을까? 한국전쟁은 다양한 이름을 가지고 있다. 625사변, 625전쟁, 한국동란, 한국전쟁, 조국해방전쟁, 조선전쟁 등등이 그것이다. 한국전쟁의 이름붙이기가 힘든 것은 그 성격이 복잡하기 때문이다. 한국전쟁은 내전인 동시에 국제전의 성격을 갖고 있다. 유엔군 참가 16개국에 남북한, 소련과 중국, 그리고 일본까지 합치면 전쟁 관련국은 20개국을 넘었다. 해방 이후 한국의 상황은 외쟁 같은 내쟁, 내쟁 같은 외쟁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국내 문제와 국제 문제가 서로 복잡하게 얽혀있었다. 즉 미소 간의 냉전, 남북한 간의 대립, 남한 내부의 갈등, 북한 내부의 권력경쟁 등등이 서로 복잡하게 맞물려서 한국전쟁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전쟁으로 크게 손해를 본 나라는 별로 없었다. 미국은 3만 명이 넘는 전사자가 나올 정도로 인명피해를 입었고 막대한 전쟁비용을 감당해야 되었지만, 공산주의에 맞서 자유세계를 지킨다는 커다란 명분을 얻었다. 국내적으로도 공산주의 침략 저지를 위해 군사력을 강화해야 된다는 명분을 얻었다. 이는 미국 정권과 군수산업에게는 큰 도움이 되는 것이었다. 소련은 비밀리에 공군병력을 참전시키기는 했지만, 직접 피해를 본 것은 거의 없었다. 오히려 중국과 미국을 싸우게 만듦으로써 중국과 미국의 연합 가능성을 차단한 효과를 봤다. 중국은 마오쩌둥의 아들을 포함해 18만 명이 넘는 전사자를 내는 등의 피해를 입었지만, 세계 사회주의 진영에서 중요한 지위를 얻을 수 있었다. 세계 최강국인 미국과 전쟁을 벌여 무승부를 기록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중국은 엄청난 국제적 위신을 높일 수 있었고 내부 결속을 다질 수 있었다.

무엇보다 한국전쟁 최대의 수혜국은 일본이었다. 일본은 한국전쟁을 통해 미국의 점령에서 조기에 벗어날 수 있었다. 미국은 일본이 동북아 지역에서 반공기지로 중요하다는 판단을 강화했고 19519월 대일강화조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이로써 일본은 조기에 독립국가로 복귀하였다. 더 중요한 영향은 경제적인 것이었다. 일본은 한국전쟁 특수를 통해 2차 대전의 전쟁피해를 급속하게 복구할 수 있었으며 나아가 세계 경제 강국으로 성장할 수 있는 결정적 기회를 잡았던 것이다. 미국은 지리상, 경제상의 이유로 대부분의 군수물자를 일본으로부터 공급받았다. 사실 일본은 직간접적으로 한국전쟁에 참가했다. 구 일본군 출신들로 소해부대를 조직해 한국전쟁에 참전했는가 하면, 과거 공산 게릴라 토벌작전의 기술과 정보를 미군 측에 제공하기도 했다.

이와 같이 한국전쟁은 주변국들에게는 크든 작든 일정한 이익이 있는 것이었고 남북한 정권에게도 자신들의 정권강화에 도움이 되기도 하였다. 결국 전쟁의 피해자는 힘없고 가진 것 없는 대다수의 민중일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4. 전쟁의 참상과 그 흔적들

1) 민간인 집단 학살

1950625일 시작된 전쟁은 1953727일 마침내 막을 내렸다. 3년을 치열하게 싸웠지만 ‘38은 비슷한 위치에서 휴전선으로 바뀌었을 뿐이었다. 그 사이 금수강산이라 불리던 한반도는 남과 북 모두 폐허가 되었다. 많은 집과 공장, 건물들이 파괴되었고 무엇보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희생을 당했다. 한국전쟁으로 인한 인명 피해자는 약 500만 명에 달했다. 그 중에는 물론 전투 중에 사망한 군인들이 많았지만, 전쟁에 직접 참여하지 않은 순수한 민간인들도 250만 이상이 되었다. 이렇게 민간인들의 희생이 많았던 이유는 전쟁 기간 중 곳곳에서 민간인들에 대한 집단 학살이 자행되었기 때문이었다.

작전으로서의 학살은 군이나 경찰이 공식적인 작전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학살을 의미한다. 대표적인 것이 한국군에 의한 거창양민학살사건과 미군에 의한 노근리양민학살사건이다. ‘거창양민학살사건19512월 발생했다. 한국군 제11사단 9연대는 경상남도 거창, 산청, 함양 지역에 주둔하여 지리산 남부 지역에서 활동하는 빨치산에 대한 소탕 작전을 개시했다. 이 과정에서 군인들은 빨치산의 거점을 없앤다는 명목으로 마을 주민들을 집단으로 학살했다. 학살을 당한 719명 가운데 젖먹이를 포함한 15세 이하의 어린이가 344, 여자 어린이를 제외한 부녀자가 218, 61세 이상의 노인이 74명이나 되었다. 이 사건은 한국전쟁 당시에도 문제가 되어 국회에서 조사단을 현지에 파견하여 진상 조사를 하려 했지만, 헌병부사령관 겸 경남지구 계엄민사부장 김종원 대령이 한국군을 빨치산으로 가장시켜 조사단을 위협함으로써 조사가 무산되기도 했다.

노근리양민학살사건19507월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읍 노근리에서 발생했다. 1950726일 미군은 남쪽으로 내려가던 피난민들을 검사한 뒤 몇 시간 후 공군 전투기를 동원하여 무차별 폭격과 사격을 가했다. 이를 피해 피난민들이 철로 밑 수로용 터널로 들어가자 미군은 터널을 향해 기관총을 난사하였다. 300여 명의 무고한 피난민의 목숨을 뺏은 이 학살은 미군이 사실상 모든 한국인을 잠재적인 적으로 간주했기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었다.

처형·처벌로서의 학살은 적에게 도움을 주었거나 앞으로 줄 것으로 예상되는 사람들을 사법적으로 처리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학살을 말한다. 남한을 점령한 북한 김일성 정권은 인민재판을 여러 우익 인사와 지주 세력 등을 처형했으며, 이승만 정권 역시 전쟁이 일어나고 곧바로 수감된 정치범과 국민보도연맹원들을 재판 없이 집단 처형했다. 특히 국민보도연맹원에 대한 전쟁 초기의 집단 학살은 이후 보복의 악순환을 가져왔다. 1949년 이승만 정권이 과거 좌파 세력들을 통제하기 위해 조직한 국민보도연맹의 가입자는 전국에 걸쳐 약 30만 명으로 추산된다. 과거 좌파였던 사람 외에도 일반 민간인들도 많이 가입했다.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에서도 나오듯이, 일반 민간인들이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한 이유는 이승만 정권에 잘 보이거나 식량과 비료를 받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일어난 후 10만 명이 넘는 국민보도연맹원들은 오직 믿을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집단 학살을 당했다.

보복으로서의 학살은 처형이나 처벌이 민간인들 사이에 개인적인 감정으로 보복하기 위해 일어난 학살을 말한다. 북한군이 점령한 지역에서는 좌파나 국민보도연맹 피해자들이 미처 피난가지 못한 우익 인사나 우익 청년단원들을 살해하는 일이 많았다. 이후 한국군이 다시 진입하면서 우익의 피해자들이 북한군에 협조했던 사람들에게 다시 보복을 가하는 악순환이 일어났다. 전라북도 고창군 무장면 월림리와 용전리의 비극은 그 중 대표적인 사례이다.

 

2) 부역자 처벌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고자 피난을 떠난 사람들도 있었지만, 미처 피난을 떠나지 못하고 북한군 점령 하에서 살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도 많았다. 특히 전쟁 초기 서울 시민들이 그러했다. 전쟁이 일어날 당시 서울 시민은 150만을 약간 넘었고, 그 중 140만 명은 한강의 북쪽에 살고 있었다. 그런데 이중에서 한강을 건너 피난을 간 사람은 약 40만 명 정도였다. 광복 후 북한 정권을 피해 내려왔던 월남민들, 고급 공무원, 자본가, 정치인, 군인, 경찰관 가족이었다. 나머지 100만 명 정도는 피난을 떠나지 못했다.

서울 시민들이 피난을 떠나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이승만 정권의 거짓말 때문이었다. 전쟁이 일어난 직후인 1950627일 이승만 정권은 북한군의 공세에 밀려 이미 서울을 포기하고 대전으로 내려갔다. 그러나 정부는 방송과 신문을 통해 전쟁 상황을 거짓으로 보도하면서 서울 시민을 속이고 있었다. "정부는 대통령 이하 전원이 평상시처럼 중앙청에서 집무하고 국회도 수도 서울을 사수하기로 결정하였으며, 일선에서도 용맹한 우리 국군이 오늘 아침 의정부를 탈환하고 물러가는 적을 추격 중이니 국민은 군과 정부를 신뢰하고 조금도 동요하지 말고 직장을 사수하라"고 하였다.

서울 시민들은 정부의 공식 발표를 그대로 믿었고, 설사 그 내용을 미심쩍어하더라도 정부가 서울을 그렇게 쉽게 포기하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628일 서울이 북한군에 점령당할 것이 확실해지자 뒤늦게 시민들이 피난을 서둘렀지만 이미 한강철교가 정부의 명령으로 폭파된 이후였다. 서울 시민 대부분은 꼼짝없이 서울에 발이 묶이고 말았다. 그로부터 3개월 후인 928일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서울이 다시 수복되었을 때, 북한군 치하에서 숨죽이며 살고 있던 대다수 서울 시민들은 오랜 칩거와 은둔에서 벗어나 해방의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기쁨은 잠시였을 뿐, 이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불순분자’, ‘부역자’, ‘빨갱이라는 터무니없는 사상공세의 올가미였다. 피난을 떠났던 도강파는 애국자가 되고 피난을 떠나지 못했던 잔류파빨갱이 매국노라는 오명을 뒤집어 쓴 채 부역 혐의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전전긍긍하는 신세로 돌변하였다. 각 직장에서는 도강파가 잔류파를 대상으로 사상 검증을 위한 심사에 들어가 부적격자를 색출하는 작업을 폈고, 시민들은 시민들대로 북한군 치하 3개월 동안 북한군에게 협조했던 사람들을 찾아내 고발하거나 보복하는 일이 일상사처럼 일어났다. 당시 서울대 교수였던 김성칠은 자신의 일기(1993<역사 앞에서>로 간행)를 통해 애국자로 자처하는 소위 도강파가 잔류파를 불순분자로 몰아가는 억울한 상황을 잘 보여주고 있다.

부역자로 몰린 사람들이 북한군에 적극적으로 협조했는지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완전한 은둔생활이 가능했던 극소수를 제외하면 나머지 대다수는 생존을 위해 바깥에 나와서 활동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그런 형편에서는 자의든 타의든 북한군에 협조해야만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승만 정권이 서울을 수복하자마자 부역자 색출 작업을 이렇게 대대적으로 벌였던 것은 전쟁 초기 패전 책임을 모면하고 체제 유지를 위한 국가의 법적 권위를 확보하기 위한 정치적 이유에서였다.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북한군 치하의 서울에 잔류할 수밖에 없었던 일차적 책임은 당연히 이승만 정권에 있었다. 부역자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 선풍은 정부의 이러한 책임을 따질 겨를을 주지 않고 잔류했던 서울 시민들에게서 터져 나올 불만과 비판을 앞질러 봉쇄하는 역할을 했다. 무엇보다 마녀 사냥식 부역자 색출작업은 반공=애국, 용공=반역이라는 극단적인 반공주의를 강화시켰다.

 

3) 피난길의 괴로움

1950928일 수복된 서울은 중국군이 개입한 후 195114일 다시 북한군과 공산군에 의해 점령당하게 된다. 그러나 이때에는 19506월과 달리 많은 서울 시민들이 피난을 떠났다. 흔히 이때의 대규모 피난을 ‘1·4 후퇴라고 부른다. 당시 기록에 의하면 195012월 말까지 이미 80만 이상의 서울 시민이 한강을 건너 남하, 피난했다고 한다. 1·4 후퇴 후에 한강 이북에 남아 있던 서울의 인구는 13만 명에 불과했는데 대부분이 노인이었다. 1·4 후퇴 당시 피난민 대다수는 얼음이 덮인 한강을 도보로 건넜다.

이 광경을 미8군 사령관 리지웨이 중장은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한강)부교의 상, 하류에는 인류의 일대 비극이 연출되고 있었다. 혹한과 강풍 중에 수많은 피난민이 채 굳어지지 않은 얼음 위를 미끄러지고 넘어지면서 건너고 있었다. 그중에는 얕은 얼음 속에 빠지거나 넘어져서 몸을 일으킬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도 있었으나, 이 비참한 행렬 가운데에는 누구 한 사람도 이웃을 돌볼 여력이라고는 없었다. 그러나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나 흐느껴 우는 사람은 없었다. 눈을 밟는 신발 소리만 가팔랐고, 탄식만을 남긴 채 피난민들은 문자 그대로 묵묵히 걸어가고 있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강추위에도 불구하고 괴로움을 견디며 피난길을 떠났던 이유는 바로 경험때문이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피난가지 않고 적의 점령 하에 살았던 사람들은 부역자 취급을 받고 많은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 이를 경험한 사람들은 이러한 고통을 당할 바에는 차라리 피난길의 괴로움이 낫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승만 정권 역시 일찍부터 피난을 강요했다. 청년의 나이로 전쟁을 겪었던 소설가 박완서는 자전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서 자신의 어머니를 통해, “떠나자, 죽는 한이 있더라도 가는 데까지 가다가 죽자. 저렇게 내모는데 안 가고 있어 봐라. 나중에 우릴 얼마나 못 살게 굴겠니? 그 꼴을 또 당하느니 죽는 게 낫다며 이러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미군의 폭격에 대한 두려움도 피난길의 발걸음을 재촉했다. 땅에서의 전쟁은 일진일퇴를 거듭하고 있었지만 공군에 의한 공중전은 미군이 압도적인 우위를 보이고 있었다. 전쟁 초부터 미군은 북한 지역과 북한의 점령 지역에 무차별 폭격을 퍼부었는데, 여기서 서울도 예외가 아니었다. 특히 1950716일 벌어진 미군의 서울 용산 폭격은 시민들에게 커다란 공포심을 불러일으켰다. 폭격 목표는 철도 조차장, 조선서적주식회사, 인쇄공장 및 육군 병기창, 고사포 진지 등 4개소였지만, 피해 지역은 용산구 이촌동에서 후암동까지, 서쪽으로는 원효로를 지나 마포구 도화동, 공덕공에 이르렀다. 그리고 수천 명의 무고한 시민들이 목숨을 잃었다. 용산 폭격이 있은 뒤에 적잖은 전쟁고아가 거리를 방황했으며, 거지들의 모습도 눈에 띄게 많아졌다.

4) 북한군의 점령 정책

북한군에 의해 점령된 지역은 빨간색으로 변해 버렸다. 중심부와 변두리를 가릴 것 없이 거리의 모든 벽면은 공산주의를 찬양하는 붉은 벽보가 차지했다. 또한 붉은 완장을 두른 청장년들은 여기저기서 불심검문을 했다. 수상한 점이 발견되지 않는 자에게는 인민의용군으로 지망하라고 권유하였다. 전쟁 초기 북한은 점령한 각 지역에서 젊은이들을 모아 인민의용군을 조직하여 전선에 투입했다. 인민의용군의 규모는 약 10~40만 정도로 추산된다. 학생들이 인민의용군에 들어가게 된 동기는 정치적 동의에 의한 자원입대부터 살아남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 강제 징집까지 다양했다.

점령 지역에는 인민위원회를 비롯한 여러 조직들이 만들어졌다. 농촌은 북한군 점령과 인민위원회 조직을 통해 기존의 마을 질서가 완전히 바뀌지는 않았다. 그러나 지역 유지들의 힘은 예전 같지 않았다. 예를 들어 일제강점기에 지역 유지들은 자신이 져야 할 징용이나 징병과 같은 부담을 마을의 다른 힘없는 사람들에게 전가하기 일쑤였으나, 이제는 인민의용군 동원과 같은 부담을 스스로 져야만 했다. 공동체적 결속도 국가의 강력한 힘 앞에서 점차 한계를 드러냈다. 이러한 전쟁 경험은 농지 개혁과 같은 사회경제적 변화와 맞물려 전쟁 이후 농촌 공동체의 질서가 변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북한군 점령 초기에는 인민재판이 열렸다. 동장, 파출소 소장, 판사, 검사들이 끌려와 죄상이라는 것이 낭독되고, "인민의 적이니 총살형이 마땅하다"고 하면 모인 군중들이 "옳소"라는 강요된 구호와 박수를 치고, 군중이 보는 앞에서 총살형을 당했다. 그러나 인민재판은 얼마 안 가서 없어진다. 평이 좋지 않고 오히려 민심이 흉흉해지는 원인이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북한군이 점령 지역에 행한 대표적인 사업은 토지 개혁이었다. 서울 점령 직후 북한의 농림부장 박문규는 500명의 토지개혁 요원을 이끌고 서울로 와서 남반부 토지 개혁령을 발표하였다. 930일자 로동신문596천여 정보의 남한 소작지를 1267천여 호에 분배했다고 밝혔다. 토지개혁을 위해 임시인민위원회 아래 토지조사위원회를 설치하였고 도, , 면 단위의 실행위원회와 리, 동 단위의 농촌위원회를 구성하였다. 토지개혁의 방법은 북한에서와 같이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방식을 따랐다.

그러나 북한이 점령한 남한 지역에서 실시한 토지개혁은 시행착오가 많았다. 특히 토지개혁과 함께 실시한 농업현물세제는 농민들의 상당한 발발을 불러일으켰다. 현물세는 원래 수확량을 기준으로 부과하기 때문에, 이를 위해 북한은 조, , 메밀 등을 낱알까지 세고 소가 몇 마리인지도 조사하였으며 호구 조사도 하였는데, 도를 넘어 농민들의 반감을 샀다. 제일 잘 익은 벼 낱알을 기준으로 세서 전체를 매기기 때문에 당연히 수확량에 비해서 세금도 많이 나왔다. 이에 양식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구덩이를 파서 숨겨 놓은 주민들도 있었다.

무엇보다 북한의 토지개혁이 큰 효과를 보지 못했던 이유는 한국전쟁 직전 남한에서도 이와 유사한 농지개혁이 이루어졌기 때문이었다. 19503농지개혁법개정안이 공포되고 4월부터 농지분배 예정지 통지서가 분배 대상 농가에 발부됨으로써 유상매수 유상분배를 골자로 하는 농지개혁이 단행되었다. 물론 남한의 농민들은 거저 토지를 분배받은 북한 농민에 비해(무상분배) 농지를 분배받기 위해 적지 않은 부담을 져야 했지만(유상분배), 그토록 소원하던 자신의 땅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이는 남한 농민이 전쟁 발발 후 북한을 적극적으로 환영하는 행동을 하지 않았을 뿐더러, 북한 점령 하에서 실시한 농지개혁 작업이 예상했던 만큼 남한 농민들을 이승만 정권으로부터 완전히 이탈시키지 못한 배경이 되었다. 한마디로 전쟁 직전 농지개혁은 그 타이밍이 절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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