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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앞에서 울다 (제럴드싯처) 상처상실위로 본문
하나님앞에서울다(제럴드싯처)상처상실위로
우리는 젊음을 잃지만 대신 성숙함을 얻는다. 우리는 가정이라는 안전장치를 잃지만 대신 우리 힘으로 삶아가는 독립을 얻는다. 우리는 독신 때의 자유를 잃고 대신 결혼 관계의 친밀함을 얻는다. 우리는 딸을 잃고 대신 사위를 얻는다. 삶은 그야말로 상실과 획득의 연속이다. 이 과정은 연속성이 있으며 쉽게 깨지지도 않는다. 우리는 지나간 상실들을 기억한다. 그리고 앞으로 얻게 될 것들을 기대한다. 우리는 친숙한 과거와 기대되는 미래 사이에서 양편에 다리를 걸치고 살아간다. 오늘 우리가 즐기는 삶의 형국은 조금씩 무대 뒤편으로 물러나가다가, 마침내 시야에서 사라진다. 그러나 앞에서 흐릿하게 보이는 것들이 조금씩 가까워지고 분명해지다가,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으며 현재라는 형국이 된다.
내용이야 어떻든 재앙처럼 찾아온 모든 상실은 언제나 나쁘다. 다만 그 방식만 다를 뿐이다. 그것을 수치화해서 비교한다는 건 불가능 하다. 상실들을 수치화해서 양으로 재려는 모든 시도는 우리를 언제나 건강하지 못한 두 가지의 극단으로 내몬다....
개가 겪은 상실은 다른 아무도 겪어보지 못한 것이기 때문에 내가 겪는 아픔 또한 다른 이들이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반대로 나는 다른 이들이 겪는 상실과 그 고통을 결코 온전히 알지 못한다.
슬픔에게 자신을 내어준다는 건 몹시 힘들지만 꼭 필요한 일이었다. 그것은 자연스럽게 그리고 때로는 의도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커다란 충격에 휩싸였지만, 세상은 내가 감당했던 많은 책임들을 조금이라도 덜어주지 않았다.
나는 고통을 너끈히 견뎌내고 반대편 끝까지 간 게 아니다. 아니, 고통 속에 있으면서 그 고통 속에서 은혜를 발견했다. 그 은혜가 나를 살게 했고 결국에는 나를 자라게 했다. 사랑하는 이들을 잃어버린 상실을 이겨낸 게 아니었다. 오히려 나는 그 상실을 고스란히 내 삶 속으로 받아들였고, 그 상실은 나의 일부분이 되었다.
자신들이 단지 환경의 산물일 수 없다는, 그런 모습을 지켜보았던 프랭클은, "그들은 극히 소수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들의 삶은 내면의 승리로 이어졌고, 영적으로 본래의 자신들을 뛰어넘어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
어떤 식으로든 삶에 의미가 존재한다면, 고통 속에서도 의미가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 고통은 우리 삶에서 떼어낼 수 없는 일부분이다. 운명이나 죽음이 그러하듯이 말이다. 그렇다면 고통과 죽음 없이는 인간의 삶은 결코 온전해질 수 없다.
고통의 계속은 곧 영혼을 빚는 계곡이기도 하다.
나는 애곡하는 일과 살아가는 일을 동시에 하는 법을 배운 것이다.
상실을 통해 충분한 파괴를 경험하면서도, 나는 내가 경험한 상실의 해악성을 확대시키지 않는 방향에서 적절하게 비극에 반응하고 싶었다. 나는 어둠으로부터 달아나려고 하면 더 깊은 어둠 속으로 들어가고 만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또한 나의 영혼이 성장 잠재력을 충분히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악한 것과 선한 것을 온전히 흡수할 줄 알고, 죽을 줄도 다시 살 줄도 알며, 포기라는 고통을 겪으면서도 하나님을 찾을 줄 아는 그런 잠재력 말이다. 어둠을 맞서기로 선택함으로써, 나는 일출을 향한 첫 발을 내디딘 셈이었다.
기쁨이나 고통 중 어느 하나만을 느끼는 경우는 없다. 고통과 기쁜은 영혼이 무엇인가를 느낄 수 있다는 걸,그것도 어느 때는 동시에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들은 영혼은 궁극적으로는 고통에 반응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성장의 가능성을 놓치고 만다. 그들은 큰 수술을 받은 후에 침대에서 나와 상처 입었던 근육을 다시 사용하기 싫다고 고집부리는 환자와 같은 실수를 저지른다.
기억이 가지는 가장 숭고한 기능이 있다면 이렇 것이리라. 기억은 과거, 현재., 미래 사이의 차이를 궁극적으로 의미 없게 만든다. 기억은 우리로 하여금 동일한 수준의 영원성을 소유하고 살아가게 만든다.
-프레드릭 부흐너.
상실 때문에 고통을 당해본 사람들이 안고 있는 문제는 그들이 미래를 그리는 데 필요한 현재의 익숙한 자원들을 모두 잃어버렸다는 데 있다.
우리는 슬픔을 통해 애통할 줄 알고 기뻐할 줄도 아는 자들로 성장한다. 우리는 슬픔을 통해 세상의 고통을 체휼하며 그와 동시에 세상의 치유를 기대하는 자들로 성장한다. 아무리 고통스럽더라도, 슬픔은 우리 영혼에 유익하다.
진한 슬픔은 우리로 하여금 인생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한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게 만든다. 고통은 우리를 보다 단순한 삶으로 이끌어 갈 수 있다.
진한 슬픔을 겪는 과정에서 우리는 현재의 순간을 보다 생명력 있게 살아갈 수 있도록 자극 받는다.
.. 상실의 슬픔속에서도, 우리는 모든 순간이 가지는 기적을 껴안을 수 있으며 우리에게 다가오는 은혜의 선물을 언제라도 받아 누릴 수 있다.
아문센이 남극점에 탐험 후 파티에서 소감을 말해달라고 부탁을 받았다. 그는 순간 어떤 근사한 영감에 사로잡혔다거나, 뛸 듯이 기쁘다거나 하는 것보다 다만 살아있어서 너무 좋다는 식의 소감을 표현했다.
은혜의 선물은 우리 모두에게 찾아온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인식하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은혜야말로 내 삶의 목적을 분명하게 해주었고 현재의 순간이 얼마나 경이로운지를 새삼 발견하도록 해주었다.
나는 누구인가? 사람들이 나를 조롱하는 동안, 내 안에선 이런 물음들이 외롭게 남아 있다. 디트리히 본회퍼.
상실은 우리 삶의 일부다. 상실은 상처입고 어리둥절하고 있는 우리가 그것을 기반으로 새로운 정체성을 형성해갈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준다.
상실을 겪음으로, 우리는 자신의 모습을 잃어버린다. 그러나 우리 자신의 모습을 잃어버림으로써, 우리는 또한 하나님과 소중한 관계를 시작할 수 있다.
나는 상실을 겪으면서 나의 삶이 얼마나 미약한지를 배웠고 내가 가진 자원이 얼마나 제한적인지도 깨달았다.
새로운 정체성을 얻으려면 우리를 도울, 우리보다 위대한 누군가가 있어야 한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공평한 삶을 허락하신다. 은혜가 머무는 세상에서 사는 일은 절대적인 공정함만이 있는 세상에서 사는 것보다 훨씬 낫다.
세상에 대한 치유가 가능해진 것은 우리의 용서나 선함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용서와 선하심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실 때, 우리에게 명령만 주시는 게 아니다. 말씀과 함께 우리에게 그 사랑까지 주신다. -코리텐붐
용서하지 않는 사람들은 자신이 희생자라는 사실을 가장 큰 변명거리로 사용한다.
용서는 계속적인 운직임이다.
나는 내가 상실을 겪은 뒤에는 어디로 향하든 매번 하나님께로 달려갔다는 걸 알게 된다.
하나님의 얼굴을 보면 아무도 살 수 없다는 얘기들을 한다. 나는 그분의 광채를 보면 아무도 살 수 없다는 뜻으로 그 말을 이해해왔다. 친구 하나는 그분의 슬픔을 알고 나면 아무도 살 수 없다는 의미 일거라고 했다. 그렇다면 어쩌면 그분의 슬품은 곧 그분의 광채가 되는 셈이다 -니콜라스 월터스토프
나는 슬픔이란 것 자체가 건강하고 적법한 감정으로 인정을 받으려면 하나님의 계셔야 한다는 걸 알았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으면, 인간의 감정은 끔찍한 상대주의 속으로 함몰될 것이며, 우리가 상실에 대한 어떻게 반응하느냐는 문제는 전혀 중요한 것으로 취급받지 못한다.
무신론은 우리가 상실을 겪으면서 갖게 되는 느낌을 인정하는 데 필요한, 현실을 보는 객관적인 시각을 우리에게서 앗아간다. 슬픔, 분노, 우울, 이런 감정들은 정당한 이유를 가진 채 영혼에서 나오는 진실한 표현들이다. 영혼이 고통을 느끼는 것은 나쁜 일이 좋은 것을 압도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주권은, 그분이 우리의 주변 환경보다 크시며 그 환경을 통해서 우리 삶을 보다 나은 것으로 만드실 것이라는 믿음을 우리에게 제공한다.
죽음이야말로 최후의 승자이며 우리는 슬픈 운명을 타고난 존재들이다. 그러나 여러 세대에 걸쳐서 신실한 크리스천들이 우리가 가는 길을 지나갔고, 앞으로도 다음 세대들이 또 이 길을 밟고 갈 것이다. 그들 모두 지금 우리가 가슴속 깊은 곳에 담고 있는 것과 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다. 예수님께서 그 모든 것 중심에 계신다. 그분은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죄와 죽음을 이기셨다.
고통은 지금으로도 충분했다. 아이들을 소홀히 하거나 필요한 사랑을 거두는 것으로 거기에 다른 고통을 더하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나는 선을 행함으로써 악을 이기고 싶었다.
그러나 가장 큰 상실은 다시 사랑하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 영혼의 죽음으로 이어진다.
이땅은 천국의 바깥쪽이 아니라 천국의 작업장이다. 하늘의 자궁이다. Peter Kreeft
그들은 우리의 마지막 말은 고통과 죽음이 아니라 하나님이어야 한다는 진리를 몸소 증거하고 있다.
이전까지는 서로 상극이라고 생각했던 것들, 슬픔과 기쁨, 고통과 즐거움, 죽음과 삶에 거대한 하나의 통합체를 이루는 일부분이 되었다. 나의 영혼은 한층 더 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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