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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의 여정(헨리나우웬),죽음,이웃,단순성,성경,아담 본문
안식의 여정(헨리나우웬),죽음,이웃,단순성,성경,아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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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생산의 그침을 뒷받침해 주는 안식일의 습관 가운데 하나는 분명히, 단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는 데 시간을 쓰려는 의도적인 선택이다. 여기서 요점은 받드시 무엇인가를 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같이 있는 것이다.
Humiliation of the word (자크 엘룰) : 그는 일상을 바꾸어 놓고 대체로 파국에 초점을 맞출 정도로, 현실에 대한 우리의 시각이 작고 단편화된 조각의 형태로 주어지는 '뉴스' 때문에 심하게 왜곡되어 있다고 한탄한다. 그 결과 우리는 세상의 사건을 부적절한 시각으로 바라보고 따라서 희망과 의미에 대한 감각도 무디어진다. 머리기사가 순간적으로 강하게 와 닿을 경우가 아니면 거기에 대해 별로 생각지 않으며, 따라서 우리의 시각은 대체로 부분을 전체 상황과의 관계에서 생각하지 않는 단절된 것이 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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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 내 평생 살아온 저 지구표면을 내려다 본다. 나는 저 아래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안다. 그들도 나와 같다. 그들이 나다. 어떤 면에서 나는 그들을 대표하는 자다. 나는 말단의 감각기관으로 이 위에 와있다. 이런 기분은 내 마음을 겸손케 한다. 내게 책임이 있음을 일깨워준다. 이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다. 눈이 보지 못하면 몸에 유익이 안된다. 눈은 보라고 있는 것이다. 내가 우주에 와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나는 이 전체 생명의 한 조각임을 깨닫는다. 나는 지금 최전방에 와있다. 어떻게든 이것을 가지고 돌아가야 한다. 특별한 책임이다. 생명이라는 것과 나와의 관계를 새삼 깨닫는다. 변화이다. 새로운 것이다. 이제 내가 돌아가면 저 세상은 달라질 것이다. 나와 저 별과의 관계가 달라질 것이며 저 별에 사는 모든 다른 형태의 생명과의 관계가 달라질 것이다. 이것을 체험했기 때문이다. 하나의 변화요 아주 소중한 것이다. (러셀 슈웨이카트, 아폴로 9호)
내가 우주의 체험을 이야기해준 모든 사람들 중 그나마 내 말을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은 나와 가장 가까운 이들이다. 내 아내는 내 어조를 통해 내 말뜻을 안다. 내 자녀들은 내 눈빛을 보아 내 말뜻을 안다. 우리 부모님은 내가 우주와 함께 자라나는 것을 보셨기에 내 말뜻을 아신다. 실제로 가서 직접 체험하기 전에는 아무도 제대로 알 수 없다.
이것이 선각자의 고독이다. 말로 표현할 수 없으면서도 여전히 전달해야만 하는 것을 목격하고 체험한 자이다. 우주비행사들의 말속에는 사제로서 나 자신의 체험이 그대로 표현돼 있다. 사제의 길은 은혜이다. 그것은 나로 비적을 보게 한다. 그것은 내가 본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야 하는 소명이다. 기나긴 고독이자 표현 못할 기쁨이다. (로버트 센커, 콜롬비아 7호)
이 성당은 우리가 크리스마스의 신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까, 방해가 됩니까?... 주교는 자신의 성당을 옹호했지만 나중에 하나님은 이렇게 말했다. "저 주교는 인간에 본성에 대해 아주 낙관적 견해를 가지고 있구나. 이 세상에 수많은 고통을 야기하는 인간의 모든 악에 대해서는 이야기 하지 않았다."
나는 어쩌면 이 성당은 하나님께 대한 깊은 신앙과 경건과 경배와 헌신과 사라의 산물 못지 않게 인간의 자만과 교만, 권력과 영향력과 성공에 대한 욕심의 산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신은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입니다. 당신의 말은 중요합니다. 당신의 말로 다른 사람들을 다치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그리고 기독교의 역사는 그렇게 한두 마디 비판으로 요약될 수 없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아귀들은 배고픔을 채우려 무엇을 먹거나 마실 때마다 극심한 고통과 소화불량에 시달린다. 목구멍이 타는 것 같고 배가 음식을 소화하지 못하여 아귀는 단 한시도 포만감을 맛보지 못한다. 그래서 그들은 고통-특히 과거의 고통-에서 완전히 벗어날 길을 찾아야 한다는 매달리지만 이 소원 자체가 환상이라는 사실을 까맣게 모른다.
여기 비록 내게 한마디 말도 할 수 없었지만 누구보다도 내게 많은 것을 가르쳐준 나의 상담자요 스승이요 길잡이가 있다. 여기 내가 여태 알았던 모든 사람 중 가장 약하면서도 동시에 가장 약하면서도 동시에 가장 강한 내 친구, 내 사랑하는 친구 아담이 있다.
... 그의 아름다운 영혼은 더 이상 그 아름다움을 표현할 수 없던 육체에 갇혀있지 않다. 나는 이 34년의 포로 생활의 깊은 의미를 자문해본다. 그 의미는 시간이 가면서 점차 서서히 드러날 것이다. 지금은 단순히 믿고 맡겨야 한다.
나는 라르쉬가 내 공동체가 되고 데이브레이크가 내 집이 된 것이 아담 때문임을 안다. 아담을 내 품에 품고 온전히 순결하고 자유로운그와 몸으로 부대꼈기 때문임을 안다. 그는 나를집으로 불러주었다. 내 몸안에 있는 집이요. 내 공동체의 몸 안에 있는 집이며 교회의 몸 안에 있는 집이고 하나님의 몸 안에 있는 집이다. 아담이 없었더라면 나는 지금 어디에 있을지 모른다.
천국의 열쇠는 어떤가? 그것 역시 우선은 예수님을 자신의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모든 이에게 속한 것이요 결과적으로 믿음의 공동체에게 속한 것이다. 그 공동체 안에서 우리의 매고 푸는 사역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루어진다. 즉 신자들로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몸이 지체들에 대해 내리는 결정은 곧 천국의 결정이다.
누군가를 깊이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부잴로 인한 고통에 자신을 여는 것이다. 그 역설이 새삼 가슴에 와 닿았다. 사순절은 부재, 빈자리, 미완성의 경험을 되새기는 때이다.
네 사랑을 나에게 전부 다오, 그러면 내가 너에게 네 이웃과 네 자신을 주겠다.
우리의 가장 깊은 아이덴티티는 다른 사람들과의 유사성에 뿌리를 두고 있다. 즉 우리는 다 약하고 깨어진 죄인이며 그러면서도 하나님의 아들딸인 것이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 비극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그 비극을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무조건적 사랑의 장으로 받아들이고 되새길 때 그 이야기는 성스러운 역사가 된다.
국적과 인종과 성적 성향과 연령과 정신 능력의 벽을 허물고 사랑의 연합-우리 가운데 가장 약한 자들도 잘 살 수 있는-을 이루는 것이 우리의 소명이다. 욕정과 성적 욕구와 육체적 연합에 대한 갈망의 수준을 뛰어넘어 몸과 머리와 마음을 아우르는 영적 친밀함의 자리로 나아가는 것이 우리의 소명이다. 자기가 잘랐다는 생각을 버리고 우리 인간성의 다양한 측면들을 새롭게 통합해 나가는 것이 우리의 소명이다. 이 소명은 곧 부활의 소명이다. 몸을 돌본다는 것은 곧 영적 연합, 친밀함, 온전함을 통해 일상생활 속에서 부활을 기대하면서도 동시에 마지막 부활의 때를 위해 몸을 준비하는 것이다.
나는 여태껏 한번도 연약함을 긍정적인 요소로 생각해 본 일이 없어요. 진직부터 그렇게 생각했어야 하는데
두 개의 삼각형을 설명한 뒤에 상향 삼각형과 하향 삼각형을 마주 놓게 한다. 빛 인도와 깨달음의 빛을 만들어내는 것은 바로 상향 삼각형과 하향 삼각형 사이의 긴장이라고 나는 믿는다.
나는 미지근한 것보다는 뜨겁거나 찬 것이 훨씬 낫다고 믿는다. 미지근하면 속이 매슥거리고 토할 것 같다. 하나님이 미지근한 것을 토하시는 까닭을 알 것 같다.
가난이란 하나님께 역행하려는 인간적 힘이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런 힘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때 우리는 하나님께 마음이 열립니다.
나는 우정, 관심, 사랑을 이해하는 데 있어 '방문'보다 더 좋은 길을 생각하기 어렵다. 수치와 죄책이 가득한 세상에서 우리는 서로 방문할 필요가 있다. 자유를 되찾고 선물을 기뻐할 수 있는 안전한 공간을 피차 마련해줄 필요가 있다.
단순성이란 삶의 작고 평범한 일들 속에서 기쁨과 즐거움을 찾는 것이다. 단순성은 나의 영혼이 존재하는 곳인 내면의 중심에 완전히 순종하는 것이다. 단순하게 살 때 우리는 창조세계와 그 아름다움의 일부가 될 수 있다. (로렌조)
내 경우 문제는 사람들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방법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소명이다. 우리는 누구에게 무슨 일로 부름을 받았는가? 사역의 결과를 자존감의 기준으로 삼을 때 우리는 결국 무너질 수밖에 없다. 정치가의 삶도 사역자의 삶도 모두 소명에 대한 응답이 될 수 있다. 그런가하면 둘 다 권력을 얻기 위한 수단이 될 수도 있다. 궁극적 문제는 우리 일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이다. 하나님이 뜻이 그분의 사랑의 표현임을 바로 아는 한 말이다.
예수님의 삶을 통해 아담을 이해할 수 있고 아담의 삶을 통해 예수님을 이해할 수 있다는 비전이 계속 나를 매료시킨다. 아담은 하나의 성례요 하나님이 나에게 말씀하신 거룩한 처소였다. 아담을 추억한다는 것은 단순히 그를 생각하며 그를 위해 기도한다는 것 정도가 아니다. 아담을 통해 만났던-곁에 가까이 남아있을 수 있다. 예수님이 내게 현실이었기에 아담도 현실이 되었고 아담이 내게 현실이었기에 예수님도 현실이 되었다.
자기를 내어주심으로 영의 양식을 증식하신 것이다. 이제 우리는 공동체로는 물론 개인적으로도 그리스도의 몸이 된다.
나는 삶의 상실들을 나를 위해 당하고 있는가? 예수님을 위해 당하고 있는가?
"하나님은 시간을 만드셨다, 그것도 많은 시간을 만드셨다' (아일랜드 속담)
"우리 어린 아이가 내 소유가 아님을 깨닫는다는 것이 어려울 때가 많아요. 하지만 어찌나 빨리 자라는지, 태어나던 순간부터 계속 나를 조금씩 떠나고 있었음을 잘 알지요. 맞아요. 아기가 이렇게 빨리 자라는 것을 보면 약간 슬퍼져요."
아이가 성인이되면 신체적, 감정적으로는 떠나보다는 것 같지만 이후에 더 감정이 자라고는 더 큰 가족을 보게 된다. 그리고 더 넓은 천국을 바라보게 된다. (나)
나는 위선의 최고의 치유책은 공동체라는 사실을 배우고 있다. 내가 돌보든 사람들과 가까이 살 때, 그리고 그 사람들로부터 사랑의 비판을 받으며 내 잘못을 용서받을 수 있을 때, 나는 위선자로 여겨지지 않을 것이다. 위선이란 설교대로 살지 못해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설교대로 살 수 없음을 고백하지 못해서 생겨나는 것이다.
용기 있다는 것은 자신의 마음에 귀기울이는 것이요 마음으로 말하고 마음으로 행동하는 것이다. 존재의 중심인 우리의 마음이야말로 용기가 머무는 곳이다.
흔히 우리는 선지자들이 죽은 후에야 그들을 칭송한다. 살아있는 동안 선지자가 될 마음은 우리에게 없는가?
"내가 죽거든 뭐든지 제일 쉬운 길로 하십시오. 나는 네델란드에 묻혀도 좋습니다. 그게 최선의 길이라면 말입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에게 내가 감사했다고 말해주십시오. 나는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천국에 가기 몇일 전 나우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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