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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알지 못했던 예수, 필립 얀시, 교회, 역사, 가난한 사람, 십자가, 진리, 도덕, 기적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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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알지 못했던 예수, 필립 얀시, 교회, 역사, 가난한 사람, 십자가, 진리, 도덕, 기적

bangla 2016. 4. 16.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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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가 신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느라 무진 애를 썼다. 그러나 교회는 그에 못지 않게 예수의 인간성을 부인하는 사람들에게 그가 인간이었음을 증명하느라 무진 애를 썼다. 그리고 그가 신이자 인간이었을 가능성은 어느 쪽으로도 기울지 않을 만큼 동등했다.

   

아홉 동안 어색한 변명은 계속되었고, 사람들은 여전히 추문을 화제 삼아 입방아를 쪘다. 생각컨대 하나님께서는 어는 것을 편애한다는 비난을 피하기라도 하려는 자신의 등장할 장소로 가능한 가장 비천한 환경을 조성하신 듯하다. 새삼 깊이 생각하는 대목이지만, 인간이 되고자 했을 하나님께서는 스스로에게 아주 혹독한 규칙을 적용하셨다.

   

G.K.Chesterton :세상의 모든 교의 가운데서 유일하게 기독교 교의만이 창조주의 성품에 용기라는 항목을 추가했다.

예수가 지상에서 보낸 첫날 밤부터 그토록 필요했던 용기는 그가 세상을 마치는 순간에 이르기까지 내내 필요한 것이었다.

   

이슬람교와 유대교는 '신은 누구도 낳지도, 누구에 의해서도 태어나지도 않았다'라고 말한다.

   

현대 이스라엘의 어린이들은 예수가 위대한 선생, 아마도 유대인으로서는 가장 위대하다고 선생이며, 이방세계에 의해 지속적으로 흡수된 인물이라고 배운다.

   

역사는 하나님이 탄생할 자궁이 되었음.

   

기원전 31년에 발생한 지진으로 3만명이 죽고, 수많은 가축들이 몰사하였으며, 사람들은 더더욱 극심한 빈곤의 고통으로 내몰렸다. 유대인들은 그러한 비극들을 일러, 메시야의 고통들이라 했으며, 하나님께 구원을 간청했다.

   

에세네파는 분파들 가운데서도 가장 분리주의적이었다. 분파사람들은 평화 애호자들이어서 헤롯과 로마에 물리적으로 대항하지는 않았다. 대신 그들은 불모의 광야지대 동굴들로 이주하여 수도원적 공동체를 세웠다. 로마의 침략은 자신들이 율법을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한 징벌이었다고 확신한 그들은 정결한 금욕생활에 헌신했다. 에세네파 사람들은 날마다 정결예식을 행했으며, 검소한 식생활을 엄격히 유지했고, 안식일에는 배변도 보지 않았다. 그리고 모든 재산은 공동으로 소유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신실성이 메시야의 도래를 촉진하리라 소망했다.

   

우리는 분명 고난 받는 메시야를 원하지 않는다. 그리고 가지 측면에서 보자면 예수도 그것은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구원은 없었다. 기적도, 쉽고 고통 없는 길도 없었다. 오로지 다른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예수는 자신을 구할 없었다.

   

당신은 기적에 의해 인간을 노예로 삼기 원치 않았소. 기적을 토대로 하지 않는 자유로운 신앙을 당신은 인간에게서 바랐던 거요 - 도스토예프스키, 대심문과=> 예수

   

하나님께서는 하나의 목적을 위해 스스로를 힘없는 존재로 만드셨다. 인간들에게 그와 관련된 일을 그들 스스로 결정할 자유를 주기 위해.

   

손으로 세상을 우악스럽게 그러쥘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또한 피조물들이 충분히 자율적으로 행동할 있을 정도로 세상과 가볍게 접촉하실 있다. -키에르케고르

   

'그런데 이상한 말이죠, 아이가 아무리 나를 거절해도 사랑은 깊어만 간다는 거예요. 말썽 없이 살아주는 다른 아이들보다 하나에 대한 사랑이 중요하단 말입니다. 이상하지 않아요? 사랑이란 원래 그런 건지.'

   

하나님께서는 불의에 대한 단호한 복수가 아니라 그저 의를 자라나게 하시는 무덤덤하고 느린 방법에 만족하시는가? 사랑이란 원래 그런 것이다. 사랑에는 자체의 힘이 궁극적으로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을 있는 유일한 힘이 있다.

   

그리스도의 모든 것이 나를 놀라게 한다.

그의 정신적 능력에 나는 전율하고,

그의 의지력에 나는 당황한다.

세상의 어떤 사람도 그리스도에 견줄 없다.

그는 진정 자족적인 존재도...

예수 그리스도와 유사한 인물을 찾기 위해,

혹은 복음에 필적할 만한 어떤 것을 찾기 위해

역사를 뒤진다면 헛수고에 불과할 뿐이다.

역사도 인류도 시대도 자연도

내게 사실을 설명하거나

비교할 만한 근거를 제공하지 못한다.

모든 것이 비범할 따름이다.

-나폴레옹

   

나는 성서에서 그의 외모에 대해 그다지 흡족하지 못한 설명, 요컨대 그리스도가 탄생하기 전에 씌어진 예언서밖에는 찾을 수가 없을까? 신약성서가 예수의 생애를 이야기할 적용하는 이사야의 구절들 가운데 그이 외양에 대한 묘사가 있다. 52:14- 53:2-3

   

예수는 다른 이들을 위한 사람이었다. 그는 다른 이들을 위해 자기 자신을 무한히 방임했다.

   

성자는 세상이 간과해 버리는 것을 크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체스터톤

   

우리의 꿈은 종종 자기가 하고 싶지 않은 하지 않아도 되고 하고 싶은 무엇이나 있는 인생을 의미하곤 한다.

   

1. 가난한 사람은 구원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사실을 안다.

2. 가난한 사람은 있는 사람들한테도 의존하고 하나님께도 기대지만, 인간이 서로 기대고 의지해야 한다는 사실도 안다.

3. 가난한 사람은 가진바 물질을 의지하기보다는 사람에게 의지해야 하는 존재다.

4. 가난한 사람에게는 부자들이 흔히 빠지는, 턱없는 자만심이라든지 도무지 들어갈 틈이 없는 프라이버시 같은 필요 없다.

5. 가난한 사람이란 경쟁에선 기대할 별로 없고 도리어 협동하는 데서 기대할 것이 있는 사람이다.

6. 가난한 사람은 사치와 필요의 차이를 안다.

7. 가난한 사람에게는 끈덕진 인내심이 있는데 이것은 어차피 남에게 의지해서만 지내야 하는 처지에서 자연히 생긴다.

8. 가난한 사람이 갖는 두려움은 대개 부자들에 비해 훨씬 현실적이며 과장돼 있다 가난한 사람은 이미 고생과 부족함 가운데 산다는 뭔지 알고 있다.

9. 가난한 사람이 복음을 들으면 그건 정말 기쁜 소식으로 들리지 부자들처럼 위협이나 야단 치는 말로 들리지 않는다.

10. 가난한 사람은 복음의 부르심에 확실히 포기하고 복잡할 없이 전부를 던지는 헌신을 있는데, 워낙 잃을 것도 없기 때문에 어떤 일이라도 시도할 준비가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쉽사리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존재다. 하지만 인정할 때는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것이다.

   

생각엔 예수께서 우리더러 용기를 보이라는 말씀이신 같습니다. 한대 맞고, 아니라 여러 대라도 맞고, 그러면서도 물러서지 않는 용기. 그러노라면 상대방 내부의 인간 본성, 증오는 가라앉고 존경심을 일으키게 하는 무언가가 깨어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점을 아셨습니다. -간디

   

그리스도인이 된다 함은 십자가를 짐으로써 마침내 우리 안에 뚜렷한 흔적이 남고 또한 구속을 이루게 되는데, 가장 좋은 것은 고통을 통해서만 오게 있는 까닭이다. -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살아가는지의 여부는

우리가 온전함에 도달하기 위한 과정에서

우리 자신의 나약함을 우리가 알고 있는지에 달려 있다.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온전한지 눈으로 확인할 없다.

다만 우리가 있는 것은

온전함으로부터 얼마만큼 비켜 있는지 뿐이다.

-레오 톨스토이

   

나는 상습적인 성폭행범은 거세해야 한다는 주장을 들어본 적이 있다. 하지만 정욕을 품었다는 이유로 눈을 뽑아야 한다는 말을 도무지 들어 적이 없다.

   

인간의 부족함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이상을 판단하지 마라. 그리스도를 온전히 따르지 못하는 우리 인간의 불완전함을 가지고 예수를 판단할 수는 없다. -톨스토이

   

'누군가 내게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진리가 아님을 증명할 있다면, 그렇게 하라. 그래도 나는 여전히 진리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을 것이다' 토스토엡스키

   

여러 동안 나는 산상수훈이 인간이 지켜야 지침을 제시하는 청사진이지만, 그것을 지킬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하지만 말을 다시 읽으면서 나는 예수가 단지 우리에게 신앙에 빚을 지우려고 그런 말을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지 알게 하려고 산상수훈을 전한 것임을 깨달았다. 산상수훈에는 하나님이 존재인지 원형이 나타나 있다. 우리가 우리의 원수를 사랑해야 하는가? 그것은 지극히 자비로운 우리의 아버지께서 선인과 악인을 구분하지 않고 햇빛을 비추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온전해져야 하는가? 하늘에 계신 우리의 아버지께서 온전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어째서 우리가 하늘 나라에 보화를 쌓아 두어야 하는가? 우리의 아버지께서 그곳에 거하시고, 보화에 대해 후한 보상을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도덕적으로 불결한 사람일 수록 예수의 매력을 훨씬 강하게 느꼈던 모양이다.

   

어쨌든 교회는 존경 받을 만한 사람들의 모임이 되었노라고 나는 학급에 말했다. 예수가 지상에 있을 때는 주변에 모여들던 버림받은 사람들이 그의 교회에서는 전혀 환영 받지 못하는 것이다. 예수, 역사상 가장 완전한 인간이었던 그가 어떻게 그토록 불완전한 사람들을 매료시킬 있었던 걸까? 우리는 그처럼 수가 없는 걸까?

   

'어땠는지 아세요? 위층 예배실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죄다 저를 위협적인 눈으로 쳐다보는 거였습니다. 그저 밑바닥을 기고 있는 동안에 사람들은 자기들끼리 만사를 갖고 누리고 있는 같은 기분이었죠. 교회 사람들은 대개 옷을 입는 편인 같습니다. 하지만 제가 갖고 있는 옷이라고 해야 청바지에 티셔츠 뿐이었어요. 기분이 나빴지만 저는 자존심 같은 꿀꺽 삼키고 화요일과 마찬가지로 일요일에도 교회에 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저를 피하지 않는 거였습니다. 오히려 다가왔습니다. 제가 예수를 만난 곳은 바로 교회입니다.'

   

그는 모든 억압된 죄를 뚜렷하게 표면에 떠오르도록 한다. 그러나 그렇게 분명히 드러나 죄를 용서해 주는 것이다. 간음한 여인은 용서받고 현장을 떠났다. 새로운 인생을 살도록 풀려난 것이다. 그리고 바리새인들은 슬금슬금 자리를 빠져나갔다. 모두 가슴이 찔린 채로.

   

엔도 슈사큐는 예수가 모성애적 메시지를 들고 나옴으로써 구약의 부성애적 사랑과 균형을 잡았다고 보았다.

   

'하나님은 인간의 모든 문제에 진정 관심을 갖고 계신가?' 하는 질문. 나로서는 문제에 답할 있는 길이 한가지 뿐이다. 대답은 내가 예수의 생애를 연구함으로써 찾을 있었다. 예수 안에서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당신의 심정을 있게 하는 얼굴을 하나 주셨다.

   

예수가 이세상의 고통을 모두 없애지는 않았다. 그는 그저 지구상의 한편에서 병자들을 고쳤을 뿐이다. 그러나 모든 인간의 고통에 대해 하나님께서 얼마나 관심을 갖고 계신지 분명한 답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정말 현실주의자로서 신자가 아니라면

기적 따위를 믿지 않을 힘과 능력을 어떻게든 마련할 것이다.

그리고 도저히 거부할 없는 기적과 맞닥뜨리면

사실을 받아들이기보다는 자신의 감각기관을 불신하는 쪽을 택할 것이다.

신앙은 기적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거꾸로 기적이 신앙에서 나온다.

-도스토예프스키

   

요한은 포도주 사건이 입구에 놓여 당시 정결레를 지키려는 유대인들의 손을 씻을 물을 담는 항아리를 소재로 해서 일어 났음을 밝히고 있다... 바리새인들이 정결례로 쓰던 물을 새로운 시대를 상징하는 술로 바꾸었다는 것이다. 정결례를 행하던 시대는 갔다. 이제 축제와 찬양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예수는 오히려 병자들을 저주 받은 것이 아니라 각별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대상으로 말한다.

   

그러나 한센병 환자들이 통증을 느낀다고 해서 이들이 고통을 모른다고 수는 없다. 오히려 내가 아는 어떤 사람들보다 고통 가운데 산다.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예수가 마비환자를 고치면서 말은 낮은 차원의 것이 아니라 높은 차원의 것을 위해서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드러내는 예라 하겠다. 예수는 질병이 단순히 몸이 불편한 정도로 그치는 것이 아닌, 훨씬 파괴적인 면이 있었음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설령 치유를 받아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필경 죽게 있다. 그렇다면 뭔가? 예수는 그저 있다가 없어질 세상의 세포를 치유하러 것이 아니라 영혼을 치유하러 것이다.

   

다음날은 가히 희극에 가까운 장면이 벌어지는데, 군중들은 저마다 배를 집어 타고는 예수를 추적하는 모습이 마치 호숫가에 노니는 고기떼가 호기심에 끌려 이리저리 몰려다니는 꼴이다. 기절을 본지 하루 만에 이들은 많은 것을 원하게 것이다. 물론 예수는 그들이 무얼 원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들은 예수를 붙잡아 억지로 왕관을 씌우려 것이다.

   

우주의 물리적 법칙에 위배하는 것이라는 관점에서 기적에 의심의 눈길을 던지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기적을 표지로 이해할 사실은 정반대다. 사망, 부패, 혼돈, 파괴야말로 오히려 하나님께서 정하신 법칙에 위배되는 것들이다. 이에 대해 기적은 원래대로 회복될 어떻게 되리라는 것을 미리 엿보는 것이라 있다. "예수가 행한 치유는 자연세계 안에 벌어진 초자연적 기적이 아니다. 오히려 부자연스럽고 상처받고 악마적이 세계 안에서 벌어진 참된 의미의 자연적 사건들이다. "-몰트만

   

하필 섭리는 가장 결정적인 얼굴을 감추고 마는 걸까? 마치 맹목적이고 멍청하며 무자비한 자연의 법에 스스로 굴복하는 것처럼... . 도스토예프스키

   

오늘날 어떤 아랍인이 뉴욕시내를 뛰어가면서 "세계무역센터를 날려 버리고 사흘 만에 다시 짓겠다."하고 소리친다면 어떤 반응이 나오겠는가 (1995)

   

예수의 말이 신선모독이 아니고, 사형을 면해도 좋은 경우가 하나 있다. 그것은 그대로가 진실이어서 예수가 메시야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그것을 믿을 있을까? 무장한 경비병에 둘러싸여 짝못하고 초라하게 묶여 있는 예수는 도무지 이스라엘이 상상했던 메시아와는 거리가 멀었다.

   

가장 약하고 거절당하고 주변에 아무도 편드는 없는 불운할 때에 , 예수는 자신이 누군지 드러내도 좋다고 생각하고는 자신이 그리스도라고 시인했다.

   

'악에 대항하는 방법도 여러 가지고 악을 정복하는 길도 여러 가지다. 그러나 모든 방법들이란 진리, 악을 정복하는 궁극적인 길은 의지를 갖고 살아가는 인간 내면에서 악이 질식돼 있어야 한다는 진리를 여러 면으로 표현한 것일 뿐이다. 마치 스폰지가 피를 빨아들이듯, 혹은 심장을 창이 꿰뚫듯, 그렇게만 되면 악은 이상 힘을 쓰지 못하고 시들고 마는 것이다.' 악을 치유한다는 것은-과학적으로든 뭐든 간에-오로지 인간 개인이 사랑할 때만 가능하다. 그러려면 의지를 갖고 어떤 희생을 해야 한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나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안다... 그리고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세상의 힘의 균형은 조금씩 바뀌는 것이다.

   

힘이란 아무리 의도가 좋아도 고통을 낳게 마련이다. 그러나 사랑은 스스로 약해짐으로써 고통을 자기가 흡수해 버린다.

   

마더 테레사.. "그래서 우리는 예수에 대한 묵상을 먼저 하지요. 그런 다음엔 나가서 그분이 어떻게 변장을 하고 계신지 찾는답니다."

   

고통이 있는 자리에 교회는 어디 있는가?

   

구름이 천둥을 몰고 오듯 주님의 전이 이제 세상에 지어질 판인데 개구리 떼는 그저 연못에 옹종 거리고 모여 개굴개굴하면서 우리만 신자요 하고 앉아 있으니 -어거스틴

   

다른 신들은 강했으나 당신께서는 약했다.

그들은 당당히 걸어서 옥좌로 나아갔지만 당신께서는 비틀거리며 나아갔다.

그러나 우리의 상처에는 오직 하나님의 상처만이 말을 있다.

다른 신들은 상처를 입지 않았으니 당신께서만 홀로 상처를 입었다.

-에드워드 실리토

   

부처는, 제들이 그의 가르침을 존중하고 그가 제시한 길을 따른다면 부처 자신은 잊어도 좋다고 말했다. 그러나 예수는 자기 자신을 직접 가리켜 내가 길이요 라고 말했다.

   

내가 그리스도인인 이유는 솔직히 가지로 요약된다. 번째는 달리 훌륭한 대안이 없기 때문이고, 번째는 예수 때문이다. 총기가 넘치며, 길들여지지 않고, 온유하며, 창조적이고, 이해하기 어려우며, 굴복시킬 없는, 그러면서도 역설적으로 대단히 겸손한 예수야말로, 나를 탐구해 보라며 당당히 자신을 내세울 있는 인물이다. 내가 바라는 하나님은 바로 아니던가.

   

나우웬, 예수가 우리를 위해 친히 탕자와 같은 존재가 . "그는 하늘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낯선 나라에 왔고, 자신에게 있는 모든 것을 표현했으며, 십자가를 통해 아버지 집으로 돌아왔다. 그가 모든 일들은 그러나 반역의 아들로서 것이 아니었다. 그는 하나님의 잃어버린 모든 자녀를 집으로 데려오기 위해 보냄 받은 순종하는 아들로서 모든 일들을 했다.... 예수는 아버지가 맡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스스로 탕자의 역할을 감내했다. 같은 사람도 그와 같이 되어, 그와 함께 아버지 집에 돌아갈 있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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