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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옳다, 정혜신, 이해받지 못하고, 공감받지 못하는 사람이 극우가 된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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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옳다, 정혜신, 이해받지 못하고, 공감받지 못하는 사람이 극우가 된다.

bangla 2025. 1. 25. 1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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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받지 못하고, 공감받지 못하는 사람이 극우가 된다.

어떻게 이해할 수 있고 어떻게 공감할 수 있을까? 

 

  • 공감은 그저 좋아 보이는 외형에 대한 지지와 격려의 반응이 본질이 아니다. 존재 자체에 대한 주목이어야 하고 그럴 때만이 그 위력이 오롯이 나타난다. 약효가 없는 약이 가짜 약이듯 공감의 위력이 없는 공감은 공감이 아니다.
    2024-10-03 07:54:44
  • 길에서 어버이연합 노인을 만났을 때 노인의 입에서 자동적으로 나오던 “종북 세력, 박근혜 대통령이……”라는 얘기를 뒤로 물리고 “밥은 드셨어요? 고향이 어디세요?”라고 한 것은 이야기의 과녁을 맞추기 위해서다. ‘그’라는 존재의 중심에 빠르게 들어가기 위해 부질없는 논쟁이 될 게 뻔한 시국과 관련한 얘기들을 뒤로 치워버린 것이다. 그래서 그날 그곳에서 그 노인 자신을 만날 수 있었다. 시국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면 노인도 그날 그곳에서 자기 자신을 만나지 못하고 다시 다람쥐 쳇바퀴 같은 수렁 속으로 자신을 밀어넣었을 것이다. 공감은, 생각과 감정들이 실타래처럼 엉켜서 나도 어쩌지 못하고 있는 그 부위에 미사일처럼 정확하게 꽂히는 치유 나노로봇이다. 이보다 더 빠르고 정확하고 정교하며 부작용 없는 치유제를 나는 아직 만난 적이 없다.
    2024-10-03 07:52:31
  • 공감의 원리도 같다. 질문을 통해서 상대의 상황과 마음이 거울에 비춘 듯 또렷하게 보이면 공감은 절로 일어난다. 공감을 받은 이의 속마음은 더 열리고 자기 기억이나 자기에 대한 느낌들을 더 잘 떠올리고 말하게 된다. 구석구석 비춰주는 거울처럼, 구석구석 빼놓지 않고 나를 담고 있는 누드 사진처럼 ‘거부감 들지 않고 다정하게, 그러나 구체적인’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 공감 유발자다. 자세히 알아야 이해하고 이해해야 공감할 수 있다. 공감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배우고 익히는 습관이다.
    2024-10-03 07:28:25
  • 상처를 덧나게 하는 질문이 따로 있다기보다 상대방에게 던진 질문이 상대방으로 하여금 나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거나 오해를 하고 있다는 증거나 나를 비난하는 의도를 품고 있다고 느껴졌을 때 사람은 상처를 받는다. 그러니 그런 마음이 전혀 아니라는 내 입장을 먼저 알려주고 시작하면 그 다음부터는 걱정 없이 물어볼 수 있다.
    2024-10-03 07:27:24
  • 공감은 다정한 시선으로 사람 마음을 구석구석, 찬찬히, 환하게 볼 수 있을 때 닿을 수 있는 어떤 상태다. 사람의 내면을 한 조각, 한 조각 보다가 점차로 그 마음의 전체 모습이 보이면서 도달하는 깊은 이해의 단계가 공감이다. 상황을, 그 사람을 더 자세히 알면 알수록 상대를 더 이해하게 되고 더 많이 이해할수록 공감은 깊어진다. 그래서 공감은 타고나는 성품이 아니라 내 걸음으로 한발 한발 내딛으며 얻게 되는 무엇이다.
    2024-10-03 07:26:11
  • 공감은 내 등골을 빼가며 누군가를 부축하는 일이 아니다. 그 방식으론 상대를 끝까지 부축해 낼 수 없다. 둘 다 늪에 빠진다. 공감은 너를 공감하기 위해 나를 소홀히 하거나 억압하지 않아야 이루어지는 일이다. 누군가를 공감한다는 건 자신까지 무겁고 복잡해지다가 마침내 둘 다 홀가분하고 자유로워지는 일이다. 너를 공감하다 보면 내 상처가 드러나서 아프기도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나도 공감받고 나도 치유받을 수 있는 기회가 된다. 공감하는 사람이 받게 되는 특별한 선물이다.
    2024-10-03 07:23:46
  • 공감은 상대를 공감하는 과정에서 자기의 깊은 감정도 함께 자극되는 일이다. 상대에게 공감하다가 예기치 않게 지난 시절의 내 상처를 마주하는 기회를 만나는 과정이다. 이렇듯 상대에게 공감하는 도중에 내 존재의 한 조각이 자극받으면 상대에게 공감하는 일보다 내 상처에 먼저 집중하고 주목해야 한다. 스스로에게 따스하게 물어줘야 한다. 언제나 나를 놓쳐선 안 된다. 언제나 내가 먼저다. 그게 공감의 중요한 성공 비결이다. 공감하는 일은 응급실 당직 의사처럼 상대에게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일이 아니다. 그럴 이유가 하나도 없다. 의무가 되면 결국 내가 먼저 나가떨어진다. 너를 공감하는 일보다 더 어려운 것이 나에게 집중하고 나를 공감하는 일이다. 대개는 여기서 걸려 넘어져 공감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사람 구하는 일에서 결정적으로 실패한다. 상대에게 더 집중하려고 자기 감정은 누르고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감정 노동에 시달리다가 결국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는 것이다.
    2024-10-03 07:21:48
  • 공감과 관련해 일종의 클리셰가 있다. 공감은 누가 이야기할 때 중간에 끊지 않고 토달지 않고 한결같이 끄덕이며 긍정해 주는 것, 잘 들어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니다. 전혀 잘못 짚었다. 그건 공감이 아니라 감정 노동이다.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들어주다 보면 지친다. 참다 참다 인내심을 잃고 폭발하거나 폭발하지 않더라도 지치고 짜증이 나서 다시는 그 사람을 만나고 싶지 않게 된다. 일방적으로 쏟아낸 사람도 집에 돌아가면 찜찜한 마음이 생긴다. 너무 내 얘기만 길게 늘어놓은 건 아닌가, 내 말만 너무 많이 한 건 아닌가. 두 사람 모두에게 유쾌하지 않은 경험으로 남을 수 있다.
    2024-10-03 07:17:39
  • 심리적으로 벼랑 끝에 있으면서도 낌새조차 내보이지 않고 소리 없이 스러지고 있는 사람이 많은 현실이라 “요즘 마음이 어떠세요”라는 질문 하나가 예상치 않게 ‘심리적 심폐소생술(CPR)’을 시작하게 만들기도 한다. 이 질문은 심장 충격기 같은 정도의 힘을 발휘한다. 간단한 심폐소생술 교육을 받은 초등학생이 거리에서 갑자기 쓰러진 성인의 목숨을 구했다는 실화처럼 심리적 CPR 또한 마찬가지다. 심리적 CPR은 꼭 배워야 한다. 그러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람을 살리게 된다.
    2024-09-29 07:21:50
  • 그렇게 감정을 억제하고 투명 인간 취급을 당하며 존재가 거의 희미해진 삶의 종착역은 어디일까. 소리 안 나는 총에 맞은 사람처럼 조용히 허물어지는 일이다. 청년 고독사가 그 극단적 결과다. 간혹 존재가 소멸되기 직전의 상태에서 과도하게 난폭해지는 경우가 있다. 산소가 점점 희박해지는 곳에 갇혀 있던 사람이 잠깐 창문이 열렸을 때 가쁘고 거친 숨을 몰아쉬듯 존재가 거의 지워진 사람들이 보이는 난폭성은 숨이 멈추기 직전의 마지막 절규 같은 것이다. ‘여기에 나도 있어. 제발 나라는 존재를 한 번만이라도 의식해 줘!’ 나는 일상에서 사람들을 만날 때 “요즘 마음이 어떠세요?”라는 질문을 자주 던지곤 한다. 단둘이 만난 자리뿐 아니라 여럿이 만나 얘기를 하는 자리에서도 그렇다. 어떤 모임이어도 이 뜬금없어 보이는 말이 끼어들 틈은 항상 있게 마련이다. 이야기가 공허하거나 무의미하게 맴돈다고 느낄 때 묻는다. 이 질문을 던지면 의외의 상황이 벌어진다. 질문 전후 이야기의 질이 확연히 달라지기도 한다. 별말 아닌 것 같지만 존재 자체에 대한 주목이어서 그렇다.
    2024-09-29 07:21:33
  • 청년 고독사를 취재하러 강남을 누빈 기자에 의하면 원룸촌이 밀집한 그곳엔 분명 사람이 있는데 지나다니는 사람도 없고 사람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고 했다. 강북에 청년들이 모여 사는 곳에선 밤이면 술 마시고 떠드는 소리 때문에 자잘한 문제들이 많은데 강남의 원룸촌은 놀랄 만큼 조용하다는 것이다. 강남에 사는 한 청년은 “여기서는 떠들면 남한테 폐를 끼친다는 강박 관념이 심해서 극도로 조심하게 된다”고 소리 죽여 말했다. 나는 그 말을 들으며 시골에서 상경해 부잣집 문간방에 기거하며 식모살이를 하던 40~50여년 전의 어린 소녀들이 떠올랐다. 낮에는 몸이 부서져라 일만 하다가 밤이 되면 문간방에 들어가 쥐죽은 듯 없는 사람처럼 지내야 했던 어린 소녀들. 자기 존재를 지우며 살아야 했던 예전 가난한 집 딸들의 모습이 21세기 강남구로 돈벌러 모여든 청년의 삶과 겹쳐 보인다. 강남이라는 거대한 부잣집에서 일하다 밤이면 원룸이라는 문간방에 틀어박혀 그림자처럼 살아야 하는 청년들의 모습은 연상만으로도 가슴이 아프다. 자기 존재를 민폐로 인식하는 청년들. 죽은 듯 사는 청년들.
    2024-09-29 07:17:38
  • 엉뚱한 짓을 하고 있는데 ‘너는 옳다’라고 지지해 주면 상대가 오판하지 않을까. 자만심에 빠져 결국 잘못되지 않을까. 쓴 약처럼 따끔한 말이 더 필요하지 않을까. 그런 게 어른다운 걱정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아니다. 그건 사람을 어리석고 표피적인 존재로만 상정하는 틀에 박힌 생각인 동시에 스스로에 대한 오만한 시선이다. 사람은 상대가 하는 말의 내용 자체를 메시지의 전부라고 인식하지 않는다. 순간적으로 그 말이 내포한 정서와 전제를 더 근원적인 메시지로 파악하고 받아들인다. ‘너는 옳다’고 해주면 A는 지금 집 밖을 배회하는 내가 참 잘하고 있구나라고 믿는 게 아니라 찌질하게 구는 나를 비난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사람의 존재를 통해서 자기 존재에 대해 안심하게 된다. 산소가 희박한 순간에 고농축 산소를 들이켜는 것이다. 사람은 기계적인 존재가 아니다. 생각보다 훨씬 입체적이고 정서적인 존재다. 어른도 그렇고 아이도 그렇다.
    2024-09-29 07:11:49
  • 젊든 늙든 우리가 왜 이렇게 아픈지 이젠 알 것 같다. 자기 존재에 주목을 받은 이후부터가 제대로 된 내 삶의 시작이다. 거기서부터 건강한 일상이 시작된다. 노인도 그렇고 청년이나 아이들도 그렇다. 너도 그렇고 나도 그렇다.
    2024-09-29 07:10:28
  • 노인은 보수단체에서 개최한 강의를 들었다. “우리나라가 지금 이렇게 잘살게 된 건 모두 어르신들 덕분이다. 어르신들이 진정한 애국자다. 오랜 세월 고생 많으셨다”는 얘기를 듣는데 코끝이 시큰했다. 노인이 말도 안 되는 폭력을 휘두르기 시작한 것도 자기 존재를 알아주는 사람들(보수단체 강사 등)을 만나면서부터였다. 오랫동안 온기조차 없었던 방구들에 불이 지펴지듯 마음이 덥혀지는 느낌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노인이 그 당당한 폭력을 후회한 것도 자기 존재에 주목해 주고 자기 삶에 귀 기울여준 사람(나)을 만나서였다. 변하지 않을 것 같은 사람도 예외 없이 변하게 하는 그 지점이 바로 ‘자기’다. 사람은 자기에 공감해 주는 사람에게 반드시 반응한다. 사람은 본래 그런 존재다.
    2024-09-29 07:09:56
  • 공황발작은 곧 심장이 멎어버릴 것 같지만 절대 멎지 않으며, 죽을 것 같은 느낌이 생생하지만 물리적으론 절대 죽지 않는 병이다. 공황발작 자체로 사람이 죽지는 않지만 자기 소멸의 끝에서 탈진한 사람이 스스로 자기 삶을 거둬들이는 경우는 꽤 있다. 심장이 약해서 죽는 것이 아니라 나를 지워가며 살던 삶의 끝자락에서 더없이 기진맥진해져서 생 전체에서 마침내 손을 놓아버리게 되는 것이다. 누구든 내 삶이 나와 멀어질수록 위험해진다.
    2024-09-28 12:20:30
  • ‘나’가 흐려지면 사람은 반드시 병든다. 마음의 영역에선 그게 팩트다. 공황발작은 자기 소멸의 벼랑 끝에 몰린 사람이 버둥거리며 보내는 모르스 부호 같은 급전(急電)이다. “내가 희미해지고 있어요. 거의 다 지워진 것 같아요”라는 단말마다. 공황발작의 원인을 생물학적 요인 중심으로 판단하면 증상을 없애기 위해 약물치료에 보다 치중하겠지만, 그러다 보면 공황발작이 의미하는 개인의 심리적 상태에 대한 집중과 해결은 놓치기 쉽다. 사람은 나를 그대로 드러내는 사람에게 끌린다. 사람이 가장 매력적인 순간은 거침없이 나를 표현할 때다. 모든 아기가 아름다운 것도 그 때문이다. 스타로서의 성공도 매력적인 나일 때, 독특한 내 스타일을 그대로 드러낼 때 가능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너의 욕망에 완벽하게 맞춰 움직이는 나로 살아갈 때만 가능하다. 스타는 어느 순간 자신이 가진 막대한 자산이 전부 너의 이름으로 되어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지금은 마음껏 인출해서 쓸 수 있지만 너의 눈밖에 벗어나는 순간부터 한 푼도 인출할 수 없으며, 그 즉시 천둥벌거숭이로 겨울 벌판에 버려지는 신세가 된다는 걸 깨닫게 된다.
    2024-09-28 12:19:08
  • 스타란 너(대중)의 취향에 나를 온전히 맞추는 사람만이 살아남는 생태계에서 최종적으로 살아남은 생존자다. 나를 너에게 맞추는 촉이 고도로 발달한 사람만이 도달할 수 있는 경지다. 다르게 표현하면 스타가 누리는 지위와 힘은 빼어난 재능과 고도의 촉을 바탕으로 자기 소멸의 경지에 다다른 이가 누리는 화려한 보상이다. 그게 스타의 본질이다. 일시적으로 그런 삶에서 벗어날 수는 있지만 스타라면 그런 삶에서 지속적으로 벗어날 수 없다. 그래서 스타는 화려하게 시든 꽃 같다. 스타가 가장 완벽하게 빛나는 순간은 나를 너에게 완벽하게 맞추었을 때다. 내가 온전히 ‘너의 욕망 그 자체’일 때, 내가 ‘나’를 주장하지 않을 때, ‘나’가 사라졌을 때다. ‘나’를 주장하는 모습이 가능할 때도 있다. 만 원 안에서 물쓰듯 써도 좋다는 호의처럼 ‘너’가 ‘자기 주장을 하는 나’를 근사하게 바라봐주는 범위에 한해서다. 온전히 ‘나’이려고 하면 스타의 자격은 몰수당한다. 스타로서의 수명은 그것으로 끝난다. 최소한 그 생태계에서는 추방된다. ‘너’의 욕망에 반(反)하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스타의 삶은 우리 삶의 완전한 축소판이다. 일상에서 누군가의 기대와 욕구에 맞춰 끊임없이 나를 지워간다는 측면에서도 그렇고, 자기 소멸의 벼랑 끝에서 SOS를 치는 삶을 살고 있다는 측면에서도 그렇다. 해외 명품 브랜드 매장에서 일하는 한 매니저는 출근과 동시에 자기 이름이 아닌 영문 이름 ‘마이클’로 자신을 설정하고 마이클로 일과를 시작한다. 업무 중 수시로 받는 무시와 모욕을 본래의 ‘나’가 아닌 ‘마이클’이 받는 것으로 간주한다. 그는 공과 사를 분리하는 프로 의식에 투철한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믿었지만 어느 날 출근길에 가슴을 움켜쥐고 응급실로 실려 갔다.
    2024-09-28 12:16:58
  • 거칠게 분류하면 스타는 두 종류다. 애초부터 대중이 원하는 방향으로 기획돼 세상에 나오는 스타가 있고, 자기 방식으로 나를 표현했을 뿐인데 대중의 폭발적인 환호와 관심을 받아 스타가 되는 이도 있다. 하고 싶은 대로 했을 뿐이고 내가 생각하는 방식이 원래 그런 것뿐인데 독특하다고 주목받으며 인기를 누리게 되는 것이다. ‘나’를 표현하는 건 나에겐 숨쉬듯 자연스럽고 특별할 것도 없는 일인데 말이다. 그런데 대중이 그 점을 특별한 것으로 느끼고 좋아하기 시작하면 숨쉬는 걸 한 번도 의식하지 않던 사람이 갑자기 자기 호흡이 신경 쓰이듯 그때부터 ‘나’는 ‘나’를 의식하게 된다. 한참을 그렇게 지내다 보면 그것이 원래의 나였는지, 내가 만들어낸 하나의 상(像)인 건지 스스로도 혼돈스러워진다. 애초에 대중의 욕구와 취향에 맞춰 기획된 스타는 물론이고 출발선이 달랐던 스타들까지도 그런 의식에서 자유롭기 어렵다. 나는 나를 의심하고 추궁한다. 나는 진짜 나인 것인가?
    2024-09-28 12:16:21
  • 경계’를 품은 공감, 그 입체적인 공감은 집밥 같은 치유, 적정심리학의 핵이다. 잘 모르고 보면 “어, 저걸 가지고 뭘 할 수 있단 말이야”라고 할 수도 있지만 공감의 위력은 어떤 힘보다 강하다.
    2024-09-28 12: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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