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design your brain
아침마다 새로우니, 유진 피터슨 본문
다윗은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 구하는 데 선수였다. 그는 당찬 말로 떳떳이 구했다. 도움, 피난처, 치유, 구원, 건짐, 용서, 긍휼, 성령을 구했다. 다윗은 놀랍도록 힘찬 찬송도 드렸으나 그 모든 찬송은 이토록 애타게 구하는 삶에서 채굴된 것이다.
성경기자는 다윗의 모든 결점을 기어이 밝힌다. 그는 다윗을 이상화하거나 미화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실패와 죄로 뒤범벅된 사람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보여준다.
창의력은 깔끔하지 않다. 질서정연하지 않다. 창의력이 발휘되면 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창의력이 발휘되면 엉뚱한 행동이 줄을 잇는다.
… 모든 창조작업에는 모험과 실수가 따른다. 그러나 너저분함 속에 깊숙이 들어가 진득이 머물면, 바로 거기서 서서히 사랑과 아름다움과 평화가 나온다.
이웃을 나보다 덜 사랑한다면 그를 내 목적의 수단으로 대하는 것이다. 이웃을 나보다 더 사랑한다면 나를 그쪽 목적의 수단으로 내놓는 것이다. 둘 다 사랑을 침해하고 자유를 파괴하는 일이다. 이웃 사랑의 계명은 당신의 자유 못지않게 내 자유를 보호하며, 내 자유 못지않게 당신의 자유를 보호한다. 누구도 자유를 희생하지 않는다. 누구도 남을 희생시키지 않는다. 모두가 더욱더 자유로워진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의 본질과 특성에 대한 신빙성 있는 증거가, 행여 감정에서 나온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감정은 놀랍고 아름답고 꼭 필요하다. 감정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아주 복잡하게 지음 받은 인간의 일면이다. 우리는 감정을 존중하고 가꾸고 나눠야 한다. 그러나 감정은 기도가 아니다. 영성 스승들이 하나같이 조심스레 가르치는 것처럼 우리는 감정에 초연해야 한다. 그래야 분별의 은혜를 지킬 수 있고, 기도로 주님의 인도를 받을 수 있다.
종교의 기능은 사람의 기분을 좋게 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사람을 만드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뜨겁고, 그래서 그 반응으로 신실하고 헌신된 사랑을 요구하신다…. 그분이 원하시는 것은 자기만의 개성을 살려 그분께 반응할 성숙하고 자유로운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되려면 정직하고 진실해야 한다. 자아의 우상이 무너져야 한다. 마음이 청결하고 생각이 깨끗해야 한다. 죄의 고백과 믿음의 헌신이 있어야 한다.
나는 하나님을 도와줄 필요가 없다. 그분이 알아서 하신다. 나는 그분의 시신을 지킬 필요가 없다. 그분을 적들에게서 보호할 필요가 없다. 나는 그분을 관리하거나 변호할 필요가 없다. 그분에게 다음 번 필요한 조치를 알려 줄 필요도 없다.
무덤은 비어 있다. 그래서 나는 집에 가도 된다. 나는 내가 부름받고 명령받은 일에 힘쓰면 된다.
나는 문제가 있을 때만 기도합니다. 그런데 나는 항상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항상 기도합니다. - 아이작 바쉐비스 싱어…
성경계시 어디를 보아도, 기도제목을 가지고 하나님께 오라는 권면 일색이다. 하나님은 후하셔서 축복이 떨어지지 않는다. 하나님은 주는 것을 기뻐하신다. 그것이 그분의 주특기다.
우리가 죄짓는 길은 유한하다. 하나님이 용서하시는 길은 무한하다. 인간조건을 몇 년만 관찰해 보면 그것을 안다. 죄는 대부분 재방송이다. 얼마 후면 알게 된다. 세대가 오고가도 사람들이 하는 일은 다 거기서 거기다.
죄짓는 데는 많은 상상력이 필요 없다. 그러나 용서와 구원은 어떠한가? 그것은 다른 이야기다. 구원은 매번 새롭고 독창적이다. 용서는 매번 허를 찌른다. 죄는 창의적인 일이 아니다. 되풀이할수록 따분해진다. 반면에 구원은 "아침마다 새롭다".
모든 기도는 끝까지 가면 찬양이 된다. 처음에 얼마나 다급했든, 분노와 두려움 속을 얼마나 헤맸든, 모든 기도는 찬양으로 끝난다. 늘 당장 쉽게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평생의 여정일 수도 있다. 그러나 끝은 언제나 찬양이다.
아무리 고난과 회의와 분노가 깊고, 아무리 절망과 회의에 빠져 "어느 때까지니이까" 되뇌어도, 기도는 결국 찬양으로 바뀐다. 모든 것이 결국 찬양의 문턱을 넘는다. 찬양은 결국 기도의 완성이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그토록 시종일관 악을 악이라 부르기를 고집한 단체는 없다. 자신들의 합리화를 그토록 가차없이 노출한 단체도 없고, 자신들의 공범자임을 그토록 용감하게 고백한 단체도 없다. 기독교 공동체는 어느 단체보다 세상의 문제를 잘 알면서도 동시에 그에 대한 냉소나 절망이 적다.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하나님을 거역하며 살려는 자들은 하나같이 삶이 형편없다. 그런 사람들은 어느 시대에나 있다. 죄는 삶의 능력을 파괴한다. 우리의 생명력을 약화시킨다. 눈이 멀어 진리를 보지 못하게 한다. 건강한 사랑과 든든한 평안을 누리지 못하도록 우리를 무력하게 만든다. 우리는 죄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그 해방을 하나님이 주신다. 시대가 변하고 세대가 바뀌어도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우리에게 해방을 주신다. 이것이 복음의 약속이다.
복음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공급하신다고 가르친다. 그분께는 축복과 구원이 넘친다. 이런 현실관이 있을 때 우리는 막힐 것 없이 당당하게 살아간다. 자신감에 차서 기쁘게 살아간다. 마음껏 믿고 마음껏 바라고 마음껏 사랑한다.
믿음이란, 실존의 가장 편한 부분에서 나오지 않고 가장 힘든 부분에서 나온다.
우리는 살벌한 세상에서 칭찬의 말을 건넨다. 문제투성이의 세상에서 승리의 노래를 부른다. 나를 이해해 주지 않고 격려해 주지도 않는 사람들 틈에서 기쁘게 살아간다. 우리는 삶의 내용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다. … 우리의 삶을 규정하는 것은 문화가 아니라 그리스도다. 우리의 하루하루를 빚는 것은 우리에게 닥쳐오는 위험이 아니라 우리가 경험하는 도움이다.
우리는 세상 권세를 용감히 에워싸는 헌신되고 훈련된 남녀 군대를 기대하지만, 정작 교회에서 만나는 이들은 마당의 잡초 제거에 더 신경 쓰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사랑과 자비가 넘치는 성숙한 성도공동체를 기대하지만, 교회식당에서 일하다 보면 음식보다 험담이 더 많다.
그럴 때는 교회를 바꾸려 하기보다 내 기대를 점검하고 바꾸는 것이 더 중요하다. 교회란, 우리가 조직하는 단체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모임이다. 교회는 내가 함께 있고 싶은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함께 지내라고 주시는 사람들이다.
세상은 내가 창조한 것이 아니다. 내 삶은 거주 주어진 것이다. 타인들의 의지와 운명이 얽힌 이 세상의 복잡한 관계는,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전격 가동되고 있었다. 제대로 살려면 꼭 알아야 할 것이 있는데, 우리는 이야기의 중간 부분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이야기는 타자에 의해 시작되었고 종결될 것이다. 그 타자는 하나님이시다.
회개는 감정이 아니다. 죄에 대한 후회가 아니다. 회개는 결단이다. 지금껏 스스로 신이 되어 내 삶을 관리할 수 있다고 착각해 왔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자력으로 살아갈 힘과 교육과 훈련을 지녔거나 얻을 수 있다고 속아 왔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
그리고 회개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내게 진리를 말씀하시고 계심을 인정하는 것이다. 회개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겠다는 결단이다.
그러나 회중 속에 있으면 배우고 또 배운다. 기도란 내 마음이 내키든 내키지 않든 계속되며, 심지어 내가 시종 잠을 자더라도 계속된다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기독교 제자도는 갈수록 내 의에서 눈을 떼어 하나님의 의에 주목하는 과정이다. 삶의 의미를 찾되 내 기분과 동기와 도덕을 파헤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목표를 믿어서 찾는 것이다. 내 열정의 기복을 그리지 않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더듬는 것이다. 바로 그 실상에서 인내가 나온다.
하지만 그런 극적인 결말로 끝나는 인생은 거의 없다. 따라서, 현실의 실상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최고의 이야기들도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
삶이란 모호한 것이다. 어정쩡한 결말이 존재한다. 모호함과 혼돈, 부조리와 어수선함 속에서 살려면 성숙이 필요하다. 그런 삶을 거부하면 뭔가를 빠뜨리는 것이다. 우리가 빠뜨리는 그것이 얼마든지 본질적이고 소중한 것일 수 있다. 믿음의 위험이요 하나님의 신비일 수 있다.
다윗이 서두르지 않고 침착하게 무릎 꿇자 새로운 대안이 열렸다. 그것은 하나님, 하나님의 방법, 하나님의 구원이었다.
죄란 잘못된 생각이 아니다. 죄는 중증장애요 하나님과 불화한 상태다. 이것이 인간조건이다. 이 장애의 현실은 우리 내면과 주변 어디에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애써 잊으려 한다. 그것을 기억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은 곧 열과 성을 다하여 사랑 안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살고 싶은 순간들도 있다. 그러나 그 순간은 오래가지 않는다. 차라리 우리는 골프를 친다. 차라리 병원에 가서 또 다른 검사를 받는다. 차라리 대학에서 또 다른 강좌를 듣는다. 계속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상대하지 않고도 삶을 개선할 수 있는 길을 찾는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하다.
예배란 가운데로 모두 모이는 것이다. 그럴 때 우리 삶은 궤도를 이탈하지 않고 하나님께 중심을 둔다. 중심은 살아계신 하나님이다. 그 중심에서 살고 그 중심에 반응하며 살고자 우리는 예배한다. 예배 없는 삶은 모든 광고와 유혹과 소음에 놀아나는 경기와 경련의 삶으로 전락한다. 예배가 없을 때 우리는 조종하며 살고 조종당하며 산다. 무서운 공포 속에 살거나 몽롱한 무기력 속에 산다.
예배하지 않는 사람들은 세상의 전염병인 걷잡을 수 없는 불안에 휩싸인다. 고정된 방향도 없고 지탱해 줄 목표도 없다.
내 안정의 근거는 내 기분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이다. 제자도란 하나님이나 나 자신이나 이웃에 대한 내 기분대로 살지 않고, 하나님에 관해 내가 아는 사실대로 산다는 결단이다. "산들이 예루살렘을 두름과 같이 여호와께서 그 백성을 두르시리로다." 하나님 백성의 실존은 확실하고 불변하고 안전하고 무사하다. 그것을 선포하는 본문의 이미지는 심리학이 이니라 지리학에서 왔다.
우리는 다 겉과 속이 따로 놀기 일쑤이다. 모순투성이다. 우리는 사건과 실망의 위력 아래 방향감각을 잃고 어지러이 휘청거린다. 모순만 의식하고 산다면, 우리는 미쳐서 정신병원에 누울 것이다. 그러나 의식주, 신뢰, 사랑, 용서, 일, 여가 등 삶을 존속시켜 주는 것들에 부응하여 살면 제정신을 잃지 않는다. 삶의 내부와 외부가 서로 맞아든다. 내면의 시끄러운 요구와 외면의 부득이한 필요가 섭리의 위계 안에 제자리를 찾는다.
기도하면 모든 필요가 하나로 통합된다. 모든 필요를 채우시는 분이 주관하시기 때문이다. 기도란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그러면 모든 것에 초점이 잡힌다.
'읽고 또 읽고 > 기독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네 믿음이 어디 있느냐, A.W. 토저 (0) | 2016.04.16 |
---|---|
마른 뼈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강준민 (0) | 2016.04.16 |
예수님의 기도를 경험하는 삶, 헨리 블랙커비 (0) | 2016.04.16 |
영으로 비밀을 말함, 김우현, 김민석 (0) | 2016.04.16 |
균형의 영성, 토미 테니 (0) | 2016.04.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