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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제 영성에 속지 말라, 마이클 호튼 본문

읽고 또 읽고/기독교

미국제 영성에 속지 말라, 마이클 호튼

bangla 2016. 4. 16. 2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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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참되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아무것도 믿지 않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어떤 것이든지 다 믿는다.

   

십자가 없는 그리스도의 목회를 하면서 심판 없는 하나님나라 안으로 진노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 죄 없는 인간들을 불러들이셨다. - 리처드 니버

   

인간의 마음은 공허하다. 인간은 누군가에게 의존해야 한다. 그러나 인간은 제 힘으로 하나님을 의지할 수 없다. 그러므로 어떤 피조물을 의지하게 된다. 미신은 역사에서 줄곧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사악한 황제이며, 세상 사람들은 그 미신의 지배를 기쁘게 받아들이고 있다. - 마틴 루터

   

비극적이게도 인간에 대한 신앙은 인간에 대한 환상에서 벗어나 인간에 대한 혐오로 끝을 맺고 있다. 인간에 대한 신앙은 역사상 그 어떤 교리보다 더 많은 전쟁과 더 피폐한 자연 환경과 더 많은 학살의 원인이 되고 있다. 우리는 자율성의 열매를 따먹게 되었으나 결국 우리 자신이 벌거벗었음을 발견하고 부끄러워하게 되었을 뿐이다.

   

후일에 이스라엘이 눈에 보이지 않는 신을 왕으로 모시는 대신에 눈에 보이는 사람을 모시기 원했던 것처럼, 지금 그들은 다른 모든 신들처럼 얼굴을 가지고 있는 신을 원하고 있다. 그들은 결코 원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과 그들이 새로운 관계를 맺어 다른 차원의 삶을 누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목적이었다.

   

오직 우리가 하나님이 정해주신 중보자를 통해 주어진 길과 법도를 따라 하나님께 나아갈 때만이, 우리의 생각과 마음 모두 다시금 새롭게 된다. 오직 그때만이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은혜와 친밀한 부성을 진정으로 체험하게 될 것이다.

   

우리들 가운데 양에게 가장 가까이 가본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양모 재킷을 입어본 사람일 것이다. 우리가 자연의 세계로부터 점차 멀어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어휘 가운데서도 자연에 대한 이미지들은 점점 사라지고 있으며, 하나님의 창조 세계와 관련하여 우리 자신을 이야기할 가능성 역시 거의 빼앗기고 있는 것이다. - 조셉 시틀러, 신학자

   

지식(영지)을 통한 자력 구원은 그 자체의 마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마력을 무해하다고 할 수 없다. -훼겔린

   

기독교 신앙은 어떤 한 견해나 인간의 확신이 아니라 아주 확고한 신뢰이고, 명확하고 견실한 지성적 동의이며, 성경과 사도신경에 제시되어 있는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이해이다. 따라서 하나님 자신과 지고선과 특히 하나님의 약속과 모든 약속들의 성취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아주 확실한 이해이다. - Second Helvetic Confession, 16세기 개혁파 신앙고백서

   

맨 처음 컴퓨터들은 계산하고 정보를 저장하는 단순한 도구로써 우리가 실재 세계와 관련을 맺도록 도와주는 데 사용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컴퓨터들은 비물질적인 현실을 만들어내는 도구들로써 점차적으로 우리가 현실 세계로부터 도피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데 사용되고 있다.

   

영지주의가 정통기독교와 다른 점

  • 객관적인 것보다는 주관적인 것을 선호함
  • 공적인 것보다는 비밀스럽고 사적인 것을 선호함
  • 비판적인 이해보다는 신비적 체험을 선호함.
  • 남성적인 것보다는 여성적인 것을 선호함.
  • 물질보다는 영을 선호함.
  • 시간보다는 영원을 선호함.
  • 물질의 역사에 의해 매개된 사건들보다는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대면을 선호함
  • 우주의 비밀들에 접근해 그 비밀들을 통제할 수 있는 영적인 테크닉들을 선호함.
  • 몸과 시간, 제도에서 벗어난 순수한 영의 영역으로 도피하는 구원을 선호함.

       

    예수님을 생각할 때, 성차를 지닌 모든 신체적이며 정서적인 특징을 소유한 한 남성으로 생각하는 것을 거슬린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 새로운 영지주의자들과 이전의 영지주의자들은 모두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을 뿐만 아니라 한 남성이 되셨다는 것을 혐오하고 있다.

       

    정통 기독교에서는 은혜가 세상을 구속한다. 그러나 영지주의에서는 은혜가 자아를 물질적 자연으로부터 구속한다. 즉, 은혜가 자연을 구원하지 않고 자연으로부터 도피하는 길을 제공해주었다. "자연주의자들은 은혜를 그들의 무대 바깥으로 밀어냄으로써 자연을 위한 넓은 공간을 마련해주었다. 양 진영 모두 창조를 구속으로부터 떼어내는 영지주의적 분리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이교주의는 인간의 올라감(상승)에 관심을 기울이지만, 기독교는 하나님의 내려오심(강림)에 관심을 기울인다.

       

    진리는 한 사람의 내면에서 일어난 것에 닻을 내리지 않고, 2000년 전에 옛 이스라엘 땅에서 일어났던 일에 닻을 내리고 있다.

       

    만약 하나님이 너무 사랑이 많으셔서 우리를 심판하실 수 없다면, 그분은 하나님이기를 그칠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은 그 자신의 성품을 위반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법이 어떤 식으로든지 하나님 위에 있기 때문이 아니라 법이 하나님의 본질의 참된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분의 법을 위반한다는 것은 그분의 성품을 위반하는 것과 같다.

       

    그리스도는 오직 하나님만이 구원할 수 있는 권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으로서 고난을 당하셨으며, 오직 사람만이 그 빚을 졌기 때문에 사람으로서 고난을 당하셨다.

       

    행위언약은 "이것을 행하라. 그리하면 네가 살리라"라고 약속하고 있지만, 은혜언약은 "살라(생명을 얻으라), 그리하면 네가 이것을 행하게 될 것이다."라고 약속하고 있다.

       

    하나님이 내게 누구와 결혼할 것인지를 말씀해주셨다라고 말하는 것은 내가 선지자이며 하나님이 방금 나를 계시의 대행자로 삼으셨다라고 말하는 것과 똑같다. 그렇지만 성경에서조차, 예언적 발언들은 선지자들의 사적 용도로 쓰이는 특징을 가지지 않는다.

       

    우리가 찾아야 하는 것은 있는 그대로 계신 하나님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자신을 감추신 하나님이다.

       

    율법은 무시무시한 심판들과 위협들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이끌어가는 데 필수적이듯이, 고난도 동일한 목적에 기여한다. 고난은 우리의 교만과 자급자족, 자기만족, 그리고 장차 올 것들에 대한 우리의 맹목을 벗겨버린다. 영원은 하나님의 고난 받고 있는 자녀들의 거친 손바닥들에 훨씬 깊이 새겨진다.

       

    수용수 군도… 감옥에 갇힌 중압감을 견디지 못하고 먼저 쓰러지는 사람들이 바로 자신들의 운명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사람들임을 깨닫게 되었다. 매일 매일을 견디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마치 간수들에 대해, 그리고 자기들의 갇혀 있는 현실에 대해 죽은 듯이 살았던 사람들이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증인 보호 프로그램이다. 우리는 이제 이 현재의 악한 세상이 아니라 장차 올 하나님의 세계에 의해 정의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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