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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케팅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 옥성호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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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케팅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 옥성호

bangla 2016. 4. 16. 2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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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삼형제는 목회자가 안 된 것만으로도 한국 교회에 공헌을 했다. -옥목사님… 아들들…

   

사회에서 신기술이 기존의 기술을 점차 빠른 속도로 대체하면서 제품 수명의 주기가 급속히 짧아졌을 뿐 아니라, 삶 속에서 영원함의 자취도 대부분 사라졌다. - 윤리실종, 데이비드 웰슨

   

마케팅은 동일한 가치를 가진 상품과 돈이 원활하게 교환되도록 하는 모든 활동을 의미합니다. 그런 마케팅 중에서도 최고의 마케팅은 판매하는 상품에 대한 별도의 영업 활동이 없이도 판매되는 상품이 구매하는 고객의 욕구를 정확하게 반영함으로써 상품이 스스로를 판매하도록 하는 마케팅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놀라는 것을 싫어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놀란다는 것은 내가 몰랐다는 것이고, 내가 몰랐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내가 바보라는 사실을 의미하기 때문이지요.

   

마케팅 교회들의 특징 중의 하나는 외부에 모든 시선을 돌리고 에너지를 쏟기 때문에 내부에서 싸울 시간도, 싸울 여유도 없다는 점입니다….

30년 넘게 변함 없이 서 있는 교회 건물 옆에 사는 사람이 그 30년 세월 동안 집 옆의 교회에 한 번도 들어가 보지 않았다면 그 교회는 도대체 어떤 교회입니까?

   

쉐퍼 박사는 만약 나에게 누군가를 전도하는 데 한 시간이 주어진다면 나는 그 시간의 50분을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그가 깨닫게 하는데 주력하고 나머지 10분을 그 살아 계신 하나님 앞에서 그가 구원이 필요한 존재인지를 알도록 하는 데 쓰겠다고 말하곤 했습니다.

   

신을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칸트는 결국 신을 알 수 없는 존재로 규정함으로 불가지론에의 문을 열었습니다. 초월적 실재가 사라진 자리에 과학이 차지하게 되었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자리를 인간 이성이 대체한 것을 의미합니다.

   

만약 하나님이 없다면 인간이 못할 짓은 아무것도 없다. - 도스토프에스키

   

오늘날의 자아에로의 함몰 현상을 설명해 줄 수 있는 변화는 인간이 누구인가에 대한 관심(human nature)에서 내가 누구인가(personality)에 대한 관심으로 바뀐 점을 들 수 있다. - 데이비드 웰스

   

나도 너를 귀찮게 하지 않을 테니 너도 나를 귀찮게 하지 말라는 암묵적 동의가 요구됩니다. 특히 무엇인 옳고 무엇이 틀렸다는 식으로 나에게 너의 진리를 강요하지 말라는 것이지요. 이 사회 속에서는 엄밀한 의미로 부모가 자식을 꾸짖는 것도 허용될 수 없습니다.

   

왜 진리만은 상대적으로 포괄적이어야 한다는 억지를 갖다 붙이는 것일까요? 비록 그런 주장이 마치 더 큰 진리를 수용하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진리를 가장 교묘하게 거부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진리는 변하지 않을 때만 진리입니다. 변하는 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느낌으로 받아들여지는 진리는 어떻습니까? 변하지 않기는 커녕 도대체 몇 번을 더 변할지 예측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오늘날 사탄의 가장 큰 설득력 있는 거짓말은 크리스천이 되는 것은 쉽다는 바로 그 거짓말이다. … 그 길은 좋은 길이고 당산은 그 길을 혼자 걸으며 당신의 죄를 놓고 아파하고 용서를 갈망하며 걸어가야 하는 길이다.

   

빌리 그레이엄은 자신의 집회를 현대적 오염으로 지키기 원했다. 그러나 그가 거둔 성공들은 그의 결심을 약하게 만들었다.

   

이단에 반대하는 것보다 더 힘든 것은 일치에 대하여 반대 목소리를 내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이 순종해야 할 하나님보다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하나님을 의지해왔다. 우리는 자신에 대한 모든 권리를 그 앞에서 포기해야 할 하나님보다 우리의 필요를 충족시켜 줄 하나님을 의지해 왔다. 그분은 우리를 위한 하나님이요. 우리의 만족을 위한 하나님이다. 이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 이런 식으로 하나님을 생각하도록 배워서가 아니라 시장을 통해 이런 식으로 하나님을 생각하도록 배웠기 때문이다. 시장에서는 모든 것이 자기 자신, 자신의 즐거움, 자신의 만족을 목적으로 하는 탓에, 우리는 교회에서도 그럴 것이라고 당연하게 생각해 왔다. 그리하여 우리는 자비로운 하나님을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는 하나님으로 바꾼다. 우리는 하나님이 다정다감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자신이 그분의 실재를 우롱하고 자신의 모험과 경력을 선전하는 데 그분을 마음대로 사용해도 하나님이 잠자코 계신다고 생각한다. 이리하여 우리는 이 세상에의 몰두라는 철창에 하나님을 가둔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통제권을 강화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온화한 은혜의 햇빛이 우리의 예상만큼 우리를 따뜻하게 하지 못하면,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번영과 성공을 쏟아 붇지 못하시면, 우리는 하나님을 더 이상 믿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것이다. - 데이비드 웰스

   

명확한 대상과 내용으로 비롯된 진리에서 오는 기쁨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희열을 아는 사람은 그러한 희열을 주는 것이 다름 아닌 하나님을 아는 지식, 즉 기독교의 교리임을 알게 됩니다. 교리가 상품을 복잡하게 만드는 제거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기독교의 생명을 유지하는 본질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지요.

   

듣지도 보지도 못한 '음악 목사'라는 타이틀이 전혀 이상하지 않은 시대가 됨…

   

자신들의 관계를 세워 나가는 데 심리학적 이론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성경적 원리를 사용하지 않는다. 사랑, 겸손, 동정, 용서, 화해, 절제 인내와 같은 성경적 개념들로 관계적 책임을 기술하지 않고 "경계선", "분리" 등과 같은 심리학적인 아이디어를 사용한다….

윌로크릭의 공식적인 이혼 정책은 "상대 배우자가 결혼 생활을 지속시킬 마음이 없는 경우" 이혼을 허용한다. 불안한 관계로부터 "분리"를 정당화시키는 심리학적 코드가 윌로우크릭의 신학을 형성해 왔다.

   

구도자 예배는 언어 중심의 커뮤니케이션을 이미지 중심의 커뮤니케이션으로 그리고 사고 중심의 커뮤니케이션을 이미지 중심의 커뮤니케이션으로 그리고 사고 중심의 커뮤니케이션을 감정 중심의 커뮤니케이션으로 바꾸었다.

   

그들의 메시지를 들을 청중을 찾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청중이 들어 줄 메시지를 찾는 데 있다. 결국 메시지가 아닌 청중이 주도하게 될 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더 이상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 되는 것이다.

   

회심이 사라진 교회 속에는 하나님에 대한 헌신이 아닌 자아 충족에 대한 결단만이 넘쳐납니다. 자아 충족을 찾아 부담 없이 윌로우크릭을 찾은 해리들에게는 처음에 그토록 신선하게 느껴지던 메시지들이 점점 더 진부하게 느껴집니다.

   

배가 부른 사람들은 예수님께 결코 "당신은 누구십니까?" 당신이 우리에게 알려 주실 진리는 무엇입니까? 라고 묻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는 이미 채워진 욕구를 더 채우기 위해 예수님을 이용할 생각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오로지 하나님의 방법에 의한 영혼 구원이다.

   

인간의 죄성은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을 먼저 살리시기 전에는 결코 그 사실을 스스로 먼저 깨달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 십자가의 거친 복음이 그 완강한 마음을 때려 부수기 전에는 결코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존재입니다.

   

나이키는 닌텐도를 경쟁업체로 생각함. 나이키의 주 타겟이 청소년. 닌텐도 게임에 정신이 팔려 게임에 몰두하면 집 밖에서 운동을 하는 시간이 줄어듬.

업종 안에서 치열하게 펼쳐졌던 시장점유율 경쟁이, 업종간의 장벽이 붕괴되고 있는 시장 환경 하에서는 고객의 시간점유율 (Time share) 경쟁으로 바뀌기 시작한다는 점. 한정된 시간 속에 당신의 브랜드는 과연 어느 정도의 시간을 점유하고 있는가?

   

성경읽기 다음으로 성도들에게 중요한 책읽기 중의 하나는 영적 거인들에게 대한 전기 읽기라고 말합니다. 저는 이 책의 제목을 다음과 같이 바꾸고 싶습니다. "진짜 컨설턴트를 만나는 법"이라고요. 우리 신앙의 스승들은 효율적인 조직 관리를 놓고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교회가 무엇이고 크리스천이 무엇인지를 놓고 고통하고 씨름했습니다.

   

경쟁이라는 단어는 성경 전체에서 단 한 번 등장… 라헬이 이르되 내가 언니와 크게 경쟁하여…

   

우리에게 경쟁 대신 소명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두 가지 사실에 대한 깨달음이 필요합니다. 첫 번째는 비록 수많은 교회의 이름은 다르지만 그 모든 교회의 주인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사실은 한 주인을 모신 많은 교회들은 마치 한 지체 속에서 조화롭게 각기 다른 역할을 수행하는 몸의 여러 기관과 같이 서로 협력해야 하는 관계라는 점입니다.

   

교회가 세상에 없는 것을 주기를 포기하고 세상이 주는 것을 함께 주려고 할 때 교회는 결국 세상과 경쟁하게 됨으로써 경쟁하는 세상에서 꼭 필요한 마케팅이 필수적인 요소로 자리잡게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십자가는 그리스에서 들여온 것이다. 알렉산더 대왕은 사형 제도 중에서 십자가를 가장 즐겨 사용했다. 알렉산더 대왕에 이어 셀레우키소 왕조는 그리스 문화에 반대하는 유대인들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다. 십자가는 그 이후 계속적으로 사용되었다. 예수가 태어나기 백 년 전에 호전적 대제사장이었던 알렉산더 아내우스는 베쏨이라는 한 고장에서만 800명의 바리새인 반란자들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다. 로마는 이 처형 방법을 노예들과 비로마인들, 전쟁 노예들 그리고 검투사들을 사형시킬 때 쓰는 일반적인 사형 방법으로 채택했다. 그리고 종종 로마인이라도 반란을 꾀하는 경우 십자가로 처형시켰다. 로마는 사형수를 올려놓고 못을 박아 높이 세우는 한 개의 수직 나무 하나로만 구성되어 있던 원래 형태의 십자가에 가로의 나무를 하나 더 추가함으로 십자가의 형태를 더 세분화했다. 그 가로 나무는 수직 나무 가장 상단에 붙이거나 아니면 요즘 우리가 알고 있는 식의 전통적 라틴 십자가와 같이 위에서 조금 아래로 내려간 곳에 위치시켰다.

조금의 자비도 받지 못한 채 사형수는 십자가 전에 먼저 심한 매질을 당하게 된다. 그런 후 십자가를 직접 들고 자신의 처형지로 가게 된다. 처형지에 도착하면 사형수가 들고 온 십자가는 거기서 기다리고 있던 축에 부착되어 높이 들리게된다. 이 못은 서 있는 축 자체에 박히는 것이 아니라 사형수의 두 발을 가지런히 놓기 위해 사용된 올리브 나무로 만들어진 조그만 판자에 박히게 된다. 손에 못을 박는 경우 찢어지기 때문에 가로의 나무 위에서 팔목에 못을 박았다. 때로는 조그만 도 하나의 가로 나무가 십자가에 추가로 부착되어 사형수의 엉덩이 밑에서 사형수의 몸무게를 지탱함으로 죽음의 고통이 더 오래 지속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사용되기도 했다. 십자가에서 사형수는 질식사 하게 된다. 이 숨막힘의 고통은 약 7,8일에 걸쳐 계속될 수 있는 긴 고통의 질식사였다. 사형 집행인은 때로는 사형수의 갈비뼈와 다리뼈를 분지름으로 그의 고통을 단축시켜 주기도 했다. 이 숨막힘의 시작은 엄청난 갈증을 불러일으킨다. 또한 십자가에 매달린 채 앞으로 휘어지는 몸이 주는 무게는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불러일으킨다. 죽음 직전 최후의 단계에 들어가게 되면 온몸을 흔들 정도의 고열과 발작이 갈증과 함께 동반된다. - 브라이언 모이나한, 저널리스트

   

그리스와 로마, 양측의 시각에서 볼 때 십자가가 가지고 있는 오명과 수치는 예수가 메시아라는 주장 자체가 한 마디로 말이 안 되도록 하는 것이었다. 1세기 십자가의 역사를 잠깐만 훑어 보면 당시 사도 바울의 동시대 사람들이 십자가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십자가는 사형수단 중 가장 끔직한 죽음이었다. 아마도 페르시아 왕국에서 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 십자가는 다른 야만족들도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십자가는 사형수가 십자가 위해서 말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천천히 질식사하도록 하는 방법이다. 결국 사형수는 십자가에 매달린 채 자신의 손 또는 발에 박힌 못에 지지해서 몸을 위로 들어 밀면서 숨을 쉬려는 시도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지쳐 질식사 하게 된다…. 알렉산더 재니우스는 8백명의 바리새인을 십자가에서 처형시켰는데 그는 바리새인들을 십자가에 매달아 놓은 채 그들의 눈 앞에서 그들의 아내들과 자신들이 군인들의 칼에 죽는 것을 보도록 했다. 이런 십자가가 주는 끔찍함은 유대인 누구나의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잇는 사실이었다. 로마는 기원전 63년에 이스라엘을 정복했다. 그리고 그후 십자가를 대대적으로 사용했다. 어떤 학자는 로마가 이스라엘을 정복하던 그 시점을 전후로 약 3만 명에 달하는 사람을 십자가에서 처형시켰다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타이루스 베스파시안은 서기 70년 예루살렘 침공시 너무 많은 유대인을 십자가에서 처형하는 바람에 로마 군인들이 십자가를 세울 공간이 없었고 십자가도 모자랐다고 할 정도였다. 이 십자가 제도는 콘스탄틴 왕이 서기 337년 폐지할 때까지 천 년에 걸쳐 그 악명을 떨친 것이다. … 사형 집행인은 사형수의 다리뼈를 분지름으로 죽음을 앞당겨 줄 수 있었다. 왜냐하면 다리가 부러진 사형수는 숨을 쉬기 위해 자신의 몸을 위로 올릴 수 없기 때문이다. 다리가 부러지지 않는 경우 죽음은 며칠이 걸릴 수도 있다. 사형수가 겪는 마지막 치욕은 시체가 십자가에 매달린 채 까마귀의 밥이 되는 것이다… 예의를 중시하는 문화인은 십자가에 대해 토론하지 않았다. 키케로는 기록하기를 "십자가라는 이 단어는 로마 시민에게는 결코 행해져서는 안 되는 것일 뿐 아니라 로마인의 생각과 눈 그리고 귀에서도 아예 제거되어야만 하는 단어다. - 존맥아더

따라서 이토록 거부감을 넘어 수치심을 주는 십자가가 하나님이 만드신 구원의 유일한 길이라고 전했던 초대 교회가 당한 고통들은 어떠했겠습니까?

   

   

바울은 쉽게 믿을 수 있다고 설교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로 나타나신 하나님은 그야말로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도록 만드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이 되었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해, 1세기 사람들이 믿음을 갖는데 방해가 되는 것 중 십자가보다 더 지독하고 끔찍한 장애물이 또 있을 수 잇을까? 나는 십자가에 대하 설교하는 것보다 더 말이 안 되는 다른 마케팅 방법은 생각해 낼 수가 없다. 이방인은 기독교 복음을 변택적이고 황당한 신화이지 정신 장애라고 불렀다.

   

스스로 존재하시는 유일한 참 신이신 하나님의 아들, 창조에 관여하셨으며 세상의 구원자이신 그분이 최근 갈리리라는 변두리 한 마을에 이상한 민족인 유대인의 한 명으로 나타나셨다는데, 그것도 전혀 말이 안 되는데 그것도 모자라 그가 십자가 위에서 일반 사형수처럼 죽었다는 사실을 복음으로 믿으라고 말하는 사람은 스스로가 나를 실성한 사람이라고 증거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페트로비치, 그 안에 뭐가 들었지?

"뭐, 그냥 … 톱밥하고 대팻밥입니다."

"아직도 모르셨단 말입니까? 외바퀴 손수레입니다. 저는 그 동안 외바퀴 손수레를 몰래 빼돌리고 있었다고요."

   

지키기 위해 싸우지 않는 진리는 믿는다고 고백할 가치도 없는 진리. - 위필드

진리는 사람의 수에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진리는 다수 편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편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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