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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또 읽고/기독교

지선아사랑해,고통,두려움,의심

bangla 2016. 4. 16. 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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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믿음의 반대는 의심이 아니라 두려움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기독교 신앙이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든 그것을 따르는 것을 말한다.

   

Though he slay me, yet will I trust him apart from the will of your Father => 원문 apart from your Father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이라는 말이 덧붙여졌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마디를 덧붙이면 의미는 전혀 달라진다. 전자는 하나님께서 참새의 죽음마저 의도하신다는 것이고, 후자는 하나님의 존재함 없이는 사물의 죽음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달리 말해 죽음은 자연 법칙에 따라 일어나지만, 하나님께서는 피조물의 죽음이 있는 곳에 항상 계시며, 죽어가는 피조물에게 평안함과 힘과 소망을 주신다는 의미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적은 하나님의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하심이다.

   

그분의 존재는 모든 피조물들을 항상 지탱하고 있다.

   

발생하는 모든 일들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선을 이루시기 위해 당신을 사랑하는 자들과 함께 일하신다.

   

무엇을 위해 믿음으로 버리는 겁니까? 밝은 태양아래 있는 사람들은 믿음을 선택적으로 가질 있지만, 저와 같이 슬픔의 그늘 아래 있는 사람은 반드시 믿어야 합니다. 믿음마저 없다면 정망 우리에게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어떤 일이 일어났을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비난하기 앞서, 아마도 예기치 못했던 문제가 발생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다. 우리는 그런 과정을 통해 신뢰와 분별력 있는 사랑의 모습을 점점 구체화 시켜 나간다.

   

내가 책을 저술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면, 그것은 축복일세, 하지만 내가 책을 그만 쓰는 것이 그분이 기뻐하시는 뜻이라면, 그것 역시 축복이라 생각하네. 내가 명성과 재주를 모두 잃어버리더라도 허영심이라고 사악한 죄악에 빠져들지만 않는다면, 그것이야말로 나의 영혼을 위해 가장 유익한 일이 것이네

   

그는 인간에게 언제나 있는 두려움을 통해서는 아무런 위안도 얻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당신은 제가 후회하지 않도록 참회하게 하셨습니다.

저는 당신을 향한 두려움을 주시옵소서 그리하면 어떤 것도 두렵지 않을 것입니다.

   

믿음의 삶은 과거의 삶과 미래의 삶으로 구성된다. --- 인내와 소망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삶속에서 하나님 노릇을 하실 있도록 자리를 비켜 드려야 한다.

   

만약 우리가 쉬지 않고 기도하지 않으면, 할일은 언제나 여기에 있을 테지만 우리 자신은 여기에 남아 있지 못하고 이상 일을 못하게 겁니다.

   

변화란 의지 작용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은혜의 작용으로 가능한 일이다. 우리는 은혜를 간구하며 끊임없이 요청하는 밖에 없다.

   

그녀는 나의 삶을 함께 나누었고 내게 사랑의 의미를 가르쳐 주었다. 나는 그녀를 통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법을 배웠다. 우리는 관계를 통해 사람이 되어간다. 오늘날의 모습은 상당 부분 그녀와의 관계를 통해 형성되었다. 그녀를 처음 만났을 , 나는 지나치게 수줍음이 많아 사회적으로 어울리지 못했으며, 감정적으로 많은 상처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못난 모습을 개의치 않고 사랑과 관심으로 나를 안아주었다.

   

하나님의 부재와 존재는 우리를 보존하고 우리를 살리기 위한 하나님의 배려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기로 결정하실 때마다, 그분은 제한을 감수하여야 한다. 그분은 우리의 관점에 맞게 자신을 낮추신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직접적으로 자신을 드러내셨다면, 믿음이 없더라도 눈으로 있음으로 분명히 우리의 자유는 제한 되었을 것이다. ---- 인격적 지식

   

삶의 여정은 자체가 목표다.

   

인생은 해결되어야 문제가 아니라 만들어가야 하는 작품이다. 작품은 우리가 회피하고 싶은 원재료

까지 사용해 만들어야 한다. --- 창조를 위한 매개체

   

그분은 땅위에 자기 실현을 이루기 위해 우리들을 자신의 은혜의 그릇으로 사용하고자 하신다.

   

하나님과 함께 있으면 고난을 초자연적으로 사용할 있는 힘을 얻는다.

   

가장 지고한 선이란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말고도 어떤한 상도 요구하지 않는 것이다.

   

만일 어떤 행위들이 진정한 의미에서 미덕이 되려면 상과 고통이 공적에 비례해서는 안된다는 것은 자명한 이치다. 만일 어떤 행위에 즉각 상이 따르고 선택이 결코 값진 것이 아니라면, 어떤 행동이 옳기 때문에 한다고 하는 유일한 동기에서 옳바로 행동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고통이 당신을 하나님께로 향하게 해주었다.

=>우리의 믿음으로 순화시키고,성숙,하나님의 역사를 나타내 보일 기회 허용,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시킴, 우리 안에 인내와 인격을 만들어

   

니체는 사람이 만일 자기 생의 이유를 안다면 고통을 견딜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다카우에서 훨씬 것을 배웠습니다. 나는 생의 주인공을 알게 되었던 겁니다. 그분은 그때에도 나를 지켜 주시기에 충분하였고, 지금도 역시 나를 지켜 주시기에 충분하십니다.

   

나의 초점은 하나님께 해명을 요구하는 데서 겸손히 그를 의지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내가 시련 가운데서 파괴되지 않는다면 시련으로 인해 나는 강해집니다.

   

생각에는, 하나님이 청년의 힘과 미를 육체적인 것으로 계획하신 같습니다. 그러나 노년의 힘과 미는 영적인 것입니다. 우리는 일시적인 힘과 미를 점점 잃어버림으로 영원한 힘과 미에 집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일부를 퇴락시키는 일시적인 것을 떠나기를 갈망하게 되며, 우리의 영원한 집을 진정으로 그리워하게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계속 젊고 강하고 아름다운데 머문다면, 우리는 떠나기를 결코 원치 않을지 모릅니다.

   

아무도 홀로 고통당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오셨으며, 그는 충분히 이해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세상의 많은 종교들이 신들을 갖고 있다. 그러나 중에 종교만이 인간이 되어 죽기까지 관심을 가지신 신을 갖고 있다.

   

고난은 어떤 값을 치르더라도 떨처 버려야 하는 하나의 참화가 아니라, 우리를 하나님을 닮은 자들로 만들어 주는 은혜의 방편임

   

예수님의 계획은 복음의 메세지를 많고 실수투성이인 인간들의 손에 남겨 주시려는 것이었다. 그는 교회의 머리로서만 자신을 제한하셨던 것이다.

   

몸이라는 개념이 주는 의미는 안에서 개개인의 고통들이 서로의 관심이 대상이 되며, 치료되며, 혹은 치유될 수도 있다는 ....

   

이리는 추운 겨울 동안 자기 뒷다리가 무감각해지면 그것을 먹어버린다고 한다. 무감각이 몸의 연합을 방해했던 것이 분명하다.

   

어떤 사람도 온전한 하나의 섬이 없다. 모든 사람은 대륙의 조각이요, 대양의 일부이다.

누구의 죽음이든 간에 다른 이의 죽음은 나의 죽음이기도 하다. 또한 인류의 일원이기에 따라서 나는 결코 물을 없다. 종소리가 누구의 죽음을 알리는 종소리인가를... 소리는 당신을 위해 울리는 것이다.

   

사람은 자기가 살아 모습 그대로 죽는다. 죽음은 당신의 전부를 나타내 주는 표현이 되며, 당신은 당신의 생애 동안에 나타내 모습만을 죽음의 순간에 나타낼 있다.

   

성실에 도달한 사람은 자신과 일치하고, 자신의 삶의 역사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자신의 가치를 강하게 느끼기에, 자신의 고유한 풍위를 존중한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간의 모습은 성실하고 창의적이며 통일되어 있는 생산적인 존재이다. 자신의 삶에서 내적인 통일을 발견한 사람, 생동감으로 가득차서 활발한 사람, 언제나 새로운 아이디어가 넘치는 사람, 주변에 무엇인가 새로운 의미를 가진 것이 생성되는 사람이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는 사람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인간은 자신만의 고유한 방법으로 하나님을 세상에 드러낸다고 여겼다. 우리가 자기 나름의 유일한 방법으로 세상에 하나님을 드러내지 않는다면 세상은 참으로 빈약할 것이다.

   

자신의 가치를 느끼는 법을 배우는 불가능할 만큼 절망적인 경우는 없다.

   

융은 자신의 가치에 대한 건강한 느낌은 인간의 모든 면을 통째로 수용하는 행위인 그림자를 받아들이는 것을 통해서 영혼안에 간직하고 있는 상징들과 표상들을 통해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모상을 받아들이는 것을 통해서 키워진다고

   

악한 본성이 행하는 가장 나쁜 행위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 왕의 아들이란 사실을 잊어버릴 때이다.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하나님과 함께, 우리는 하나님 없이 살고 있다. 하나님은 세상이 자신을 십자가에 처형하도록 허용한다. 하나님은 세상에서 무기력하고 약하게 존재하고 있고, 바로 그렇게 존재하기 때문에 그는 우리 곁에 있고 우리를 돕고 있다.

   

예수는 당신의 사랑으로 당신을 죽이는 사람들 조차 물리치지 않는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좌절과 무기력의 역사이다.

   

하나님의 전능에 대한 믿음은 사람들이 겪고 있는 곤궁에 대해 눈을 감게 하는 아편이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이들을 위한 기도는 그들을 위해 있는 일을 하도록 나를 부추긴다.

   

그는 자기 자신과 자신의 고유한 품위를 발견한다. 그리고 자신과 함께 머무르고, 자신과 함께 있는 것을 오랫동안 견뎌 있는 능력이 있다.

   

자신의 가치를 느끼기 위해서는 자신의 삶의 역사와 화해부터 해야

   

영성적 자신은 바로 안에서 가시적이고 가청적인 존재가 되고자 하시는 유일하고, 바꿀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열등의식의 치유 -> 공동체 의식을 통해서

   

상처들은 내가 그들과 화해하자 마자 곧장 나와 다른 사람을 위한 축복의 샘이된다.

   

예수는 그녀가 행한 긍정적인 행동을 강화시켜 그녀를 자기 자신 안에 들어 있는 좋은 힘과 만나게 한다.

   

용서는 다른 사람의 힘으로 부터 완전히 벗어나는 행위이다.

용서할 없는 사람은 자신을 괴롭힌 사람에 의해 좌우된다.

   

힘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고, 하나님이 지니신 전능의 표현이며, 세상에 하나님이 현존하신즌 것에 참여하는

   

힘은 세상에서 살아가는 존재로서 인간들이 함께 하는 데에 실제적인 질서를 유지하는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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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바라보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을 보지 못함.

하나님을 바라보아야---자기자신을 보고 포기하지 말것...하나의 때로 삼으시고 이루심...

'여호와 께서 말씀대로 사라를 권고하셨고 여호와께서 말씀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 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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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선아 사랑해> 생명의 말씀사

   

오빠가 좋아했습니다. 처음에는 지선이를 구해낸 것이 실수처럼 보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모든 일이 실수가 아니었음을 우리 하나님은 계속 보여주고 계십니다. 이미 안에 시작하신 일을 끝까지 나타내실 것을 믿습니다.

   

그리고... 부끄럽게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죽으려고 했습니다. 얼마나 다쳤는지도 모를 때였는데, 정신이 왔다갔다 때였는데 어떻게 그렇게 못된 생각까지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산소호흡기로 목을 눌러 산소가 들어오지 못하게 해보았지만 맘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몸에 무언가 줄이 달려 있기에 그걸 뽑으면 죽을까 싶어서 발가락으로 당겨 빼보았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겨우 소변을 받아내는 줄이었습니다. 사람이 얼마나 우스운 존재인지요.

   

모든 고통은 하나님만 기억하시기 원합니다. 그동안 뿌린 눈물과 피와 고통의 기억들은 하나님만 기억하시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다만 제가 경험했던 그곳은 '끝이 있는 지옥'이었음을 기억하고 싶습니다. 끝이 있는 지옥은 차라리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예전의 못습으로 돌아갈 없다는 사실 같은 제게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예전의 모습을 사랑하신 하나님 께서 지금의 역시 사랑하고 계시다는 너무 알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눈에 보이는 대로, 귀로 들리는 소식으로 걱정하고 마음 아파하는 사람들이 없기를 바랐습니다. 그냥 넘겨짚으며 하게 되는 걱정과 동정은 정말 아무 소용도 필요도 없었으니까요. 저를 불쌍히 여겨주셔야 분은 하나님 오직 한분뿐이니까요. 하나님 한분이면 족하기 때문입니다.

   

장애는 불편할 뿐이지, 결코 불행하기 않습니다. 행복과 불행의 경계는 장애와 비장애에 있는 아닙니다. 땅이 장애의 기준을 눈에 보이는 것으로, 신체의 다름과 불편으로 삼았을 뿐이지, 실제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의 건강과 다름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누가 장애인이고 비장애인일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입니다.

   

사는 것은, 살아남는 것은 죽는 것보다 훨씬... 천배 만배는 힘들었습니다. 귀한 삶을 동정하지 마십시오. 넘겨짚지도 마시고 오해하지도 말아주십시오. 우리는 세상에 정말 중요하고 영원한 것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들입니다. 생명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사랑이 얼마나 따뜻한 것인지, 행복은 얼마나 가까이에 있는지, 정말 세상에 부질없는 것들이 무엇잊니, 기쁨과 감사는 얼마나 작은 것에서 부터 시작되는지... 우리는 그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마음껏 부러워하셔도 좋습니다. 저는 당당할 것입니다. 우리는 특별한 사람... 당신은 사랑받기위해 태어난 사람입니다.

   

왼손보다 오른손이 짧고 움직여지지 않는데 오른손을 지켜주시지 않았냐고 울며불며 원망하는 아니라, 왼손이라도 오른손처럼 심하지 않아 있으니 감사하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손가락을 절단하러 들어가는 수술실 앞에서는 더많이 자르지 않아서 감사하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술을 마시고 운전해 우리차를 들이박은 그분께 조금도 미운 마음이나 분노가 생기지 않도록 마음을 지켜 주셨습니다. 달라진 삶과 얼굴을 것으로 받아들일 있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아무리 성인군자라 해도, 아무리 성격이 좋은 사람이라고 해도 갖기 힘든 마음을 그리 착하지도 않던 제게 선물로 주셨습니다.

   

고난은 축복입니다. 힘겹고 괴로운 시간을 보내고, 이기고 나면 주어지는 보물이 있습니다. 고난을 통하지 않고서는 배울 없는 가질 없는 열매들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저는 이제 있습니다.

누군가 제게 물었습니다. 예전의 모습으로, 사고 나기 그자리로 되돌려준다면 어떻게 하겠냐고. 바보 같다고 할지 모르겠지만 대답은 되돌아가고 싶지 않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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