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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또 읽고/기독교

존재의 이유, 자끄 엘룰

bangla 2016. 4. 16. 2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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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은 하나님이 아니며 하나님을 넘어서지도 않는다. 그것은 우리의 것이며 우리 안에 있다. 그것은 우리의 조건의 일부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지배될 수는 없지만 알려질 수는 있다.

   

불행하게도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불행하게도, 다음 세대가 우리의 경험으로부터 아무런 유익도 얻지 못하리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경험은 잊혀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미래는 예측 불가능하고, 과거는 잊혀지며, 오직 현재만이 남는다.

...

누구도 완전무결한 상태에서 나는 있다라고 말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 삶을 위해 남겨진 것은 오직 현재밖에 없지만, 그것도, 영원이 순간 안에 거한다는 진부하고 고전적인 표현에 따라, 우리가 현재 안에 존재 그 자체나 영원성을 갖는다고 거만하게 주장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렇다.

   

기억으로의 도피나 영광스러운 미래로의 도피란 없다. 오늘, 당신은 있는 그대로 당신이어야 한다. 그것이 전부이다.

   

소유가 늘어날 수록 존재는 줄어든다.

   

결국 악이란, 돈은 모든 것을 가능케 하며 그리고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데 있다. 이것이 악이다. 당신은 이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다. 당신은 이 모든 것에 집착할 수 있으나, 그것은 당신이 아무것도 아닌 것과 관련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여기에 악이 있다. 단순히 불행이 아니요, 단순히 빈정거림이 아니라 악이다. 모든 것 안에 있는 이 헛됨, 연기, 불확실정과 그리고 이 냉혹한 공정증명 사이에 있는 이 모순은 정확히 이것이 무엇이든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

   

현실주의는 경건한 이상주의를 이긴다. 노동은 인간관계의 부패요인이다. 노동을 통한 연대란 없으며 지배와 적개심만 있다…. 헛된 것을 위해 서로 싸우는 인간들 사이에 적개심과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바로 노동이다.

   

우리 세계는 행복을 거짓된 가치라고 판단할 수 없다…. 행복은 어제나 오늘이나 헛되고 어리석고 무의미하며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세상의 일들이 중요하지 않다. 그러므로 하나님께로 돌아서라.

   

지혜는 덧없는 것이지만 필수적인 것이다.

지혜는 헛됨과 무에 굴복한다. 그것은 내 노력을 좌절시킨다.

왜냐하면 내가 스스로 지혜자가 되겠다고 결심하는 그 순간, 내가 지혜자가 아님을 알아차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것을 파악하고 이해하며 우지의 비밀을 알아내어 질서를 부여하겟다는 주장을 더 이상 하지 않는 순간부터 우리는 일련의 사소한 것들, 경험적 사소한 사실들, 강요 없는 사소한 진리들 앞에 직면한다. 모든 것이 헛됨을 아는 것은 우리를 이 사소한 것들의 중요성으로 이끌고 간다. 우리는 이것들을 무한히 중요시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가 파악할 수 잇는 모든 것이며, 우리 삶의 소금과 진리를 만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가 파악할 수 있는 모든 것이며, 우리 삶의 소금과 진리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실존의 수수께끼를 풀게 하기 위해 무슨 체계나 지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주셨다. 실존만이 실존에 대답한다. 참지혜는 하나의 사상이나 개념이 아니라 하나의 인격, 곧 예수 그리스도이다.

   

비극은 무엇이 광기이고 무엇이 이성 또는 지혜인지 식별하기가 불가능한데서 시작한다. 절대적인 모순이 있으면서도 그 한계가 보이지 않고 유동적이다. 게다가 정확히 실존적인 영역에서 지혜자와 우매자 사이의 차이가 없다. 그들은 동일한 삶, 동일한 운명, 동일한 목적을 갖는다.

   

지혜는 매우 유용하다. 어리석음은 악이다. 하지만 둘 사이의 차이와 거리는 복잡한 경험 속에서 볼 때 거의 없다.

   

지식을 더하는 자는 고통을 더한다.

   

파국이 일어나지 않았을 때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견해를 바꾸신 게 아니라 인간의 처신이 바뀜으로써 하나님이 뒤로 물러나 사태를 처음으로 되돌리신다는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 하나님을 절대적인 결정자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인간의 항구적인 아동교육가로 이해해야 한다. 즉, 자연법칙에 의해서가 아니라 말씀을 통한 인간과의 대화에 의해 행동하는 교육가이다.

   

시간은 새것을 창조할 가능성.

   

우리는 자연이 아니라, 자연보다 더 심오한 것에 의존적이다.

   

하나님만이 새것을 창조하실 수 있다. 그분만이 인간의 마음속과 동시에 역사 속에 철저히 새로운 요인을 개입할 수 있다.

   

시오랑은 말하기를, 죽음이 삶의 목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다. 그러면 달리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 그것은 삶이 죽음의 목적이라는 것이다.

   

말의 홍수는 존재의 축소를 낳는다.

   

상황은 부조리하고 모든 노력은 헛되다. 이것은 낙담할 이유가 아니라, 오히려 당신의 손이 미치는 모든 것을 해야 할 이유이다.

   

하나님이 당신을 위해 준비하시게 하라. 하나님을 방해하지 말라. 하나님이 당신을 통해 일하시게 하라. 당신은 인생에서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선하지 않은지,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해서는 안 되는지, 무엇이 성공하고 무성이 성공 못할지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알 수 없다. 하지만 당신은 전반적으로 하나님이 모든 것을 행하신다는 것을 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행복하다. 왜냐하면 이 경외 자체가 하나님의 임재이기 때문이고, 그것을 경험하는 자에게 주님의 임재를 확인해주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그분의 존재 안에서 사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궁극적인 모습을 모르고, 그 모습에 드러나지 않는 신비가 있음을 알면서, 또한 그것이 행복한 신비임을 알면서 하나님 안에서 사는 것이다. 하나님 경외는 모든 두려움을 내몰고 신뢰와 새로운 기쁨의 근원이 된다. 명백히 모든 것은 이 하나님 경외로 시작한다. 나머지 모든 것, 곧 헛됨, 덧없는 즐거움, 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감사, 인간의 삶은 그것에서 유래한다.

   

만사를 성취하시는 이 하나님은 자신을 내주어 알리시는 하나님이요, 스스로 인간과 관련시키는 하나님이며, 기독교인의 경우 그리스도로 자신을 내어주시는 하나님이다. 그는 기계가 조립되었다는 식으로가 아니라 다 이루었다는 의미로 모든 것을 행하셨다.

   

피할 수 없는 죽음에 직면해서, 삶 자체는 모순이다. 왜냐하면 삶은 살기를 원하지 죽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삶의 목마름은 영원의 목마름이다.

   

인간의 영원 욕구에 대해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로 응답하셨다. 그리스도만이 이 욕구를 채우신다. 왜냐하면 화육된 하나님, 우리와 함께하는 하나님, 인간 안에 있는 영원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오직 악이란 정확히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이 주셨음을 망각하는 것이리라.

   

오히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행복하다. 왜냐하면 이 경외 자체가 하나님의 임재이기 때문이고, 그것을 경험하는 자에게 주님의 임재를 확인해주기 때문이다.

   

계명이란 정확히 삶과 죽음 사이에 그어진 선이다. 계명의 위반은 협소하고 째째한 도덕법에서의 복된 해방이 아니다. 그것은 죽음의 영토로 들어가는 것이다.

   

우리가 이런 허약성을 말하고, 이런 문제 삼기를 실행하며, 양심의 검토를 요구하며, 우리 운명의 허약함 가운데서 역사의 최고의 주인의 철저한 보증 하에 노출된 채 존재하기 위해 모든 확고함을 일소하는 것보다 더 나은 이 책은 과연 어떤 책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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