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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또 읽고/기독교

예수 하버드에 오다,하비 콕스

bangla 2016. 4. 16.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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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적인 삶을 사려 깊고 성숙하게 고찰하기 위해서는 관용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 그것은 결정할 있는 권리를 주장하는 것에서부터 나아가 무엇을 결정하는 것이 옳은가를 고려하는 입장으로 옮겨감을 의미한다.

   

예수님이 랍비였다는 , 그는 단순히 이미 정해진 해답을 건네주기만 분이 아니라는 , 그는 단순히 이미 정해진 해답을 건네주기만 분이 아니라는 , 오히려 윤리적 결단을 위해 각자가 스스로 생각할 있는 사고 방식, 랍비적이라 불릴 있는 그런 사고 방식을 제시함으로 각자가 스스로 문제를 풀도록 유도했다는 등을 배우게 되었다.

   

예수와 우리 사이의 심연을 메우기 위해 필요한 번째 요소는 그가 자기 백성들이 지녀오던 윤리적 전통을 이어받아 그것을 여러가지 새로운 요구에 따라 적용했지만, 단순히 법령이나 원리에 근거하여 그렇게 것이기보다는 오히려 구체적 이야기나 실제적인 모본에 근거하여 그렇게 했다는 사실을 명심하는 것이다.

   

나는 '내가 어느 이야기나 이야기들의 부분인가?'하는 질문에 대답할 있으면, '내가 무엇을 해야 할까?'하는 질문에 대답할 있을 것이다. -Alasdair MacIntyre

   

'이야기하는 기술은 끝나가고 있다'-Walter Benjamin 이야기꾼

우리가 정말로 이야기를 잘하는 사람들과 만나는 일이 점점 줄어든다는 사실을 그는 슬퍼했다.

'이것은 마치 우리에게서 필요 불가결한 무엇, 우리가 가진 가장 안전한 무엇, 우리의 경험을 서로 교환할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서 사라지는 것과 같다.'

   

   

모든 삶은 설화적 모양을 가지고 있고, 인간으로서 우리의 사명은 다시 이야기할 가치가 있는 삶을 사는 것이다.

   

'그리스도교 이야기의 중심에는 예술적이고 대중적 상상력이 만들어낸 사랑스러운 백인여인이 그의 아들 앞에 찬양의 자세로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이 있을 없다. 거기에는 식민지에 살면서 온갖 희생을 강요당하면서도 이에 대항하며 살아남으려고 몸부림치는 임신한 여인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 Elizabeth Schussler Fiorenza

   

팔레스타인 상류 가정이 마리아의 난자를 사겠다고 했으리라 믿지 않는다. 마리아는 그들이 찾는 타입의 여자가 아니었다. 그러나 분명 마리아는 하나님이 찾고 계시던 그런 여자였다.

   

첫째 예수는 인간 생명의 자연스런 과정에 동참했다는 것이다. 그는 작은 태아로 시작하여 젊은 여인의 산고를 통해 자궁 밖으로 나왔다. 예수는 비너스처럼 제우스 신의 눈썹에서 장성한 모습으로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것이 아니다.

둘째, 그리스도교에서 이해하는 대로 하나님은 인간이 가장 한계, 고통 기쁨, 실의, 죽음 모든 것을 인간과 나누어 가지길 염원하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가 우리를 위해 돌아가셨다고 말하지만, 경우 어린아이들은 예수를 위해 죽은 셈이다.

   

예수가 어린 시절 피란민으로 살았다면 그는 매일 다른 언어, 다른 문화, 다른 종교의 사람들과 어울려 살았을 것이다. 이집트인들과의 만남이 모두 괴로운 것뿐이라고 믿기는 어렵다. 그가 짧은 성년의 삶을 동안 그렇게도 다양한 사람들에게 그렇게도 놀라울 정도로 개방적이었던 것은 때문이 아니었을까?

   

예수의 탄생 이전 동안에도 랍비가 있었던 것이 사실이지만 랍비가 유대인 공동체에서 중요한 지도자로 부각된 것은 기원 70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로 희생 제사가 불가능하게 되고, 이에 따라 제사장들의 역할이 이상 필요 없게 이후의 일이다. 그러나 오늘날 더욱 많은 사람들이 지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스스로 피란민 생활을 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씨앗이 싹이 트고 자라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 나는 자기들이 뿌린 씨가 모두 활짝 피는 것을 보지 못하는 것이 가르치는 이들의 공통적인 운명임을 알고 있다.

   

쿠란이 완성된 직후 주석가들은 가장 멀리 있는 경배장소를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산과 동일시했다. 그들은 무함마드가 처음에는 사람들에게 예루살렘을 향해 기도하라고 가르쳤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처럼 무함마드는 하나님과 모세 사이를 왔다 갔다 하다가 결국 숫자가 다섯 번으로 줄어들었다. 그래도 모세는 숫자를 줄여보라고 했지만, 이번에는 무함마드가 거절했다. 전능자와 이런 식으로 협상하는 것이 너무나 당혹스러운 일이라고 했다. 아무튼 결과로 오늘 하루에 다섯 기도하라는 이슬람의 법이 생겨났다. (유대인들은 하루에 하도록 되어 있다.)

   

의미를 창조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은 인간으로 남기 위해서 반드시 뭔가 기억해야만 한다. Josef Hayim Yerushalmi 그러나 기억은 사실의 정확한 기록보다 훨씬 더한 무엇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사실은 기억되기 위해 설화로 전달되는 일종의 형식에 짜여들어 가야만 한다.

"역사의 의미는 실제적인 역사 기술에서보다 예언자들에게서 더욱 직접적으로, 더욱 깊이 탐구될 있다. 집단 기억은 연대기를 통해서보다 예배 의식을 통해 더욱 적극적으로 전달되는 것이다."

   

학생들은 적어도 "그래 그렇게 밖에 없었다" 하는 것이 "그게 마땅히 그래야만 했다" 것과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는 , 아마도 일치하는 일이 거의 없다는 것을 발견할 있게 되었다.

   

회개는 과오에 대해 진심으로 뉘우치는 , 이런 과오가 다른 사람들에게 끼친 상처에 대해 슬퍼하고 자책하는 , 그리고 이런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겠다고 깊이 열망하는 것이다. 세가지 요인이 없다면 하나님으로부터나 동료 인간으로부터 참된 용서는 기대할 없다는 것이다.

   

"내가 말하고 싶은 하나님은 가장자리에서가 아니라 중심에, 나약함이 아니라 강함에, 따라서 죽음과 죄책감이 아니라 인간의 삶과 선함에 있는 그런 하나님이다."

   

종말론은 시간 혹은 말세로서의 종말론이 아니라 시간의 종말이다. 갑갑한 시간적 울타리를 넘어선다는 의미로서의 종말론이다. 우리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은 속에 살지만 뭔가 이상의 , 뭔가 더한 것이 있으리라 생각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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