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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캐처스(토미태니),임재,영광,얼굴,자아,배고품,갈망,임신,울음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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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캐처스(토미태니),임재,영광,얼굴,자아,배고품,갈망,임신,울음

bangla 2016. 4. 16.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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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캐처스(토미태니),임재,영광,얼굴,자아,배고품,갈망,임신,울음

   

우리는 하나님을 찾을 만한 때에 찾아야 한다. 그분의 앞에 엎드려 겸손한 열정으로 눈물을 흘리든지 아니면 완전한 절망과 자포자기 속에서 우리의 전존재를 드려 주님의 품안으로 돌진하든지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느 경우라도 좋다. 하지만 하나님은 만족하는 자의 냉담한 무시하신다. 하나님은 열정이 없는 자를 위해서는 아무것도 하실 수가 없다.

   

대하야, 네가 드리기 원하는 예배와 내가 받기 원하는 예배는 다르다. 너는 예배를 마치고 만족하며 떠나간다만 네가 떠나 , 나는 여전히 목마르구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그러나 비록 내가 자포자기할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나의 찬양과 예배를 받으시며 오히려 나를 찾아오신다는 확신이 들었다. 나는 하나님을 갈급해하는 마음이 얼마나 위력을 지니는지 서서히 알아갔고, 인간만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역시 우리를 찾고 계시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이런 아름다운 형체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공간에 영구적으로 존재하고 있다. 그러다가 차가운 공기와 만나 결정을 이루면 우리 눈에 보인다. 형태는 특정 장소에 국한되어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장소를 불문하고 모든 곳에 나타난다. 결정체가 만들어지는 조건만 갖추어진다면 즉시 모습을 나타낸다.

   

우리는 우리의 방식대로 하나님께 가고자 한다. 그리고 아무 문제도 없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은혜가 허리까지 차오르는 경험을 하면 아마 그들은 여기에 초막 셋을 짓고 같이 삽시다 라고 것이다. 은혜의 순위가 목까지 차서 물위로 떠올랐다 내려갔다 하는 경험을 한다 해도, 우리는 이렇게 말할 있어야 한다. '아직 멀었더, 은혜의 바다에서 헤엄칠 있을 만큼 잠겨야 '

   

'내가 그들을 만나러 가는 까닭은 그들이 잘해서가 아니라. 단지 그들이 나의 자녀이기 때문이다. '

   

사랑에 빠진 연인들을 매혹시키는 것은 상대에 대한 열정이다. 상대의 매력에 대해 이따금씩 무관심한 동의를 표하는 정도가 아니라는 말이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역시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지금까지 베풀어주신 은혜에 감사하고 있다. 동시에 하나님께서 앞으로 해주실 일들을 갈망하고 있다.

   

만족과 배고픔 하나만 결여되어도 진정한 부흥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모든 은혜에 감사해야 한다. 하나님을 감사할 모르는 심령을 돌보지 않으신다. 동시에 우리는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갈망해야 한다.

   

나는 신약성경 어디에서고 '만족하라, 냉담하라, 무관심하라' 가르치는 명령을 아직까지 찾아보지 못했다.

   

주님 영혼의 가난함을 고백합니다. 사도 바울과 같이 저의 유일한 자랑은 제가 주님께 절대적으로 의지한다는 것뿐입니다. 저는 영원토록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필사적으로,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주님만 바라봅니다. 하나님 없이 저는 아무 일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없고 움직이지 못하며, 어떤 기능이나 역할도 없습니다. 하나님 저는 영적 장애인입니다.

   

주님 제가 교회를 나설 교회에 때보다 배고픔을 갖게 하옵소서. 저희가 항상 주님께 감사하게 하시며 동시에 갈망하는 마음을 갖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은혜를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저희는 여전히 배고픔니다. '저희는 하나님께 굶주려 있습니다.' 기도가 제가 드리는 처음이자 마지막 기도가 되게 하여 하여 주세요.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하나님은 무한하신 분이기 때문에 상자에 담을 없다. 따라서 그러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려면 우리 또한 상자에 담을 없는 무한한 배고픔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결국 인위적인 영성 프로그램들은 무용지물이다. 프로그램이란 언제 어디서 누군가가 체험한 내용을 재현하기 위해 포장된, 예측 가능한, 인위적인 재생산체계라고 정의될 있다.

   

있을진저 너희 율법사여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가져가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았느니라.

   

나는 삭개오를 억지로 뽕나무에 오르게 있지만 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다. 나는 나무를 심고 가꿀 뿐이다. 배가 고파 나무에 오르는 것은 삭개오의 몫이다. 아무튼 나는 나무를 심고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그가 운명의 나무에 오르기를 기다릴 뿐이다.

   

일단 너무 배가 고파 나무에 오르기만 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초대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를 초대하고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 아버지, 바디매오의 영혼이 저희 마음을 사로잡아 저희 안에 주님을 갈망하는 마음이 싹트게 하옵소서. 저희 몸과 마음이 주님을 향한 배고픔과 주님을 향한 열정으로 가득 차기 원합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가까이 계신데, 주님을 그냥 지나가시게 없습니다. 우리는 주께 너무나 굶주려 있습니다. 배고픔이 너무 절실해서 뒤로 물러설 없습니다. 아버지, 이제 과거와 선을 긋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원합니다. 주님을 간절히 원하기에 뒤로 물러설 없습니다. 이제 배고프다고 주님께 외치겠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을 두려워하여 장롱 속에 숨지 않겠습니다. 도와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우리는 지금 우리가 고안한 인간 중심 프로그램과 공식으로 수레를 만들어 하나님의 영광을 운반하려

쓰고 있다. 우리가 프로그램과 공식을 선호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그것은 너무 편하고, 예측하기 쉽고, 육신을 기쁘게 하기 때문이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을 붙잡았다면, 결단코 하나님을 보내지 말라!'

   

아버지, 저를 불쌍히 여겨주세요, 저는 말을 잃으지 오래며 하나님께서 행하라고 명하신 일들을 하나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성령님! 삶이 변해야 성령님이 거하실 공간이 생긴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성령님이 거하실 공간이 생긴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성령님을 만나면 삶에 커다란 변혁이 일어난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간절히 바라건대 안에 들어와 내주해 주세요. 모세처럼 간절히 울부짖습니다.

'주님! 주님의 영광을 보여주소서!'

오직 가지, 주님만을 갈망합니다. 심령에 배고픔에 불을 붙여주세요. 저에게 주님만을 더욱더 갈망하는 마음을 주세요. 하나님의 뜨거운 숯불과 거룩함으로 혀와 가금을 지져주세요. 주님을 갈망합니다.

우리 교회에 하나님의 불을 붙여주세요, 우리 청년부에 하나님의 불을 붙여 주세요. 우리 집에 하나님의 불을 붙여주세요. 제가 원하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주님의 얼굴을 보여주세요.

   

'내가 가장 바라는 것은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과 편재하심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예배당 안에서 위안을 얻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선행을 보시고 벌레 같은 나를 구원해주시기를 기도드리는 것이다.'

....> 은혜를 알라!!!

   

여러분이 진정 필요한 것은 목회자의 안수기도가 아니라 심령을 어루만져주시는 하나님의 손길입니다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의 말하는 일도 내가 하리니 너는 목전에 은총을 입었고 내가 이름으로도 너를 앎이라 모세가 가로되 원컨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사무엘이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셔서 말로 하나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니.'

   

당신은 단지 축복만을 바라른 것이 아니라 축복을 주시는 분인 하나님, 그분 자체를 갈망하고 있다.

   

1.하나님 아버지를 만나려면, 반드시 어린아이와 같이 되어야 한다.

2. 하나님의 신부로서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하나님을 열정적으로 추구하라는 것이다.

3. 위기에 순간에...우리가 울면 하나님이 거절 못하신다.

   

과연 당신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 진정으로 목이 마른지, 진정으로 배가 고픈지 돌아보라. 당신이 해야 일은 하나님의 땔감이 되는 일이다. 땔감이 없는 불은 연기만 피우다가 꺼진다. 인간의 희망이라는 지평선에 실망의 그림자만 드리울 뿐이다. 하나님의 임재에 접근하되, 스스로 불이 되어 타고자 하는 욕구를 가져라.

   

어떤 사람의 기도가 훌륭했다 해도, 그날 이스마엘이 드린 단순한 울부짖음에는 미치지 못한 것이다.

   

   

'내가 그들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이제 내려가서 백성들을 건져내어 해방시키겠노라.'

   

마음이 바뀐 까닭은 막내딸이 조리 있게 말해서도 아니고 아이의 주장에 타당한 논리가 있었기 때문도 아니다. 논리는 아빠의 마음을 바꾸는 것과 전혀 관계없다. 열정과 사랑의 관계가 차가운 아빠의 마음을 봄날 녹듯 녹인 것이다.

   

나는 언젠가 할머니가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은 기억이 난다.

'너는 언제나 나의 아기란다.' 아버지의 나이는 55 였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을 제외한 다른 모든 것은 제게 의미가 없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향해 배고픕니다. 채워주옵소서.

   

'교회가 임신한 것이 별로 반갑지 않아. 그냥 옛날로 돌아갔으면 좋겠어'

그러나 미안하다. 하나님의 교회는 지금 임신중이다. 하나님의 교회는 지금 분만 대기중이다.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 무언가 새로운 일을 행하실 것이다. 결정적인 순간을 위한 만반의 준비가 완료되었다. 교회는 이제 전에 입었던 옷을 입지 못한다. 전에 먹던 음식을 먹지도 못한다. 입맛도 변했다. 교회는 새로운 것을 찾고 있다. 감정 상태 또한 무척 예민하다.

....

당신은 스스로 하나님의 약송을 오랫동안 임신하고 있다고 느껴본 적이 있는가? 당신은 하나님의 약속을 임신하기 위해 있는 모든 일을 다했다. 이제 해산의 순간을 기다리며 무릎꿇고 필사적으로 매달릴 때가 되었다.

절망이란 다른 것들이 없은 일을 해내는 놀라운 능력을 지니고 있다. 절망은 우리의 육신과 이성에 대한 자신감을 시들게 하는 힘이 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지성을 주셨고, 그것을 사용하라고 명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지성을 활용하여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칸막이를 설치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한밤중에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그것은 지독한 고통 속에서도 예배를 드린다는 의미이다. 육체의 속박, 영의 속박, 쓰라린 상처, 극복하기 힘든 환경의 무게. 모든 것을 넘어 하나님의 얼굴을 구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신체활동에 필요한 양보다 많은 음식을 섭취한다. 왜냐하면 배고픔을 충족하기 위해서 이다. 그러나 영적인 일에 대해서는 정반대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배불리 먹지 않는다. 그래서 결국에는 영양실조에 걸린다. 이유는 가지, 우리가 아무런 영양가도 없는 달콤하고 기름진 영적 인스턴트식품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만일 당신이 먹지 않아도 배고품을 느끼지 못한다면, 당신의 생명은 위태로워진다. 당신의 육신은 병이 들고 무관심이 당신의 영혼을 서서히 갉아먹을 것이다.

   

만족은 우리의 결혼 생황을 파멸로 이끈다. 만족은 열정을 시들게 한다. 열정이 시들면 배우자의 존재도 사라진다. 만일 배우자와의 관계를 원활하게 유지하고 싶다면 열정의 불꽃을 꺼트리지 말아야 것이다.

   

나의 유일한 목표는 하나님의 마음을 사로잡고, 하나님의 분명한 임재 속에서 안식하는 일뿐이다. 나는 만족 상태에 머무르길 원치 않는다. 만족 상태에 머물러 영혼이 혼수상태에 빠지는 것을 결코 원하지 않는다.

좌절한 배우자는 상대를 향해 '나는 당신에 대해 너무나 알고 있어!' 아닌, '당신이 너무나 보고 싶어요!'라고 말해야 한다.

   

오직 자아가 죽은 자만이 정말로 하나님의 얼굴을 있다.

   

나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불사릅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내가 타는 것을 보기 위해 오던 걸요. -존웨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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