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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소독시, Orthodoxy, G.K.체스터턴 본문

읽고 또 읽고/기독교

오소독시, Orthodoxy, G.K.체스터턴

bangla 2016. 4. 16.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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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는 구심적이지만 그리스도교는 원심적이다. 그리스도교는 밖으로 부수고 나간다. 원이 그 본질 내에서 완벽하고 무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은 그 크기 내에서 영원히 고정되어 있다. 그것은 결코 더 커지거나 더 작아질 수 없다. 십자가는 비록 그 중심에 하나의 충돌과 모순을 가지고 있지만, 그 모양을 바꾸지 않고도 네 내의 가지를 끝없이 뻗어 나갈 수 있다. 중심에 하나의 역설을 지니고 있기에 모습을 변형시키지 않고도 성장할 수 있는 것이다. 원은 그 자체 위로 되돌아오며 갇혀 있다. 반면에 십자가는 그 가지가 사방으로 열려 있다. 그것은 자유로운 여행자들을 위한 이정표이다.

   

과거의 겸손은 인간을 계속 걷지 못하게 만드는 신발 속의 못 같은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 하여금 멈추지 못하게 하는 박차였다. 과거의 겸손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노력을 의심하게 만들어 결과적으로 더욱 열심히 일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새로운 겸손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목표를 의심하게 만들어 열심히 일하지 못하게 한다.

   

조소를 일삼던 지난 시대의 사람들은 너무도 교만해서 확신을 하지 못한 반면에 현대인들은 너무도 겸손해서 확신을 하지 못한다.

   

세계가 있는지 의심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세계보다 더 회의적인 세계는 없다.

   

의지의 모든 행위는 자기제한적이다. 행동을 욕구하는 것은 제한을 욕구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행위는 자기희생적인 행위이다.

   

호랑이를 호랑이 우리로부터 해방시킬 수 있을지언정 호랑이를 그것이 지닌 줄무늬로부터 해방시킬 수는 없다. 낙타를 그 혹의 짐으로부터 해방시켜서는 안 된다. 그렇게 되면 낙타를 낙타가 아닌 것으로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니체는 암소 한 마리도 두려워했다. 톨스토이는 농민을 찬양만 했을 뿐이다. 그러나 잔 다르크는 그녀 자신이 바로 농민이었다. 니체는 전사를 찬양만 했을 뿐이다. 그러나 잔 다르크는 그녀 자신이 바로 전사였다.

   

소년들은 로맨틱한 이야기를 좋아하지만, 아기들은 사실적인 이야기를 좋아한다. 아기들은 그런 이야기가 로맨틱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실 현대의 사실적인 소설을 읽고도 유일하게 지겨워하지 않을 인간이 바로 아기일 것이다. 이것은 동화가 단지 호기심과 놀라움에 대한 거의 태아기 때의 도약을 반향하고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증명해준다.

   

도덕성은 한 사람이 다른 누군가에게 "네가 나를 때리지 않으면 나도 너를 때리지 않겠다."라고 말함으로써 시작된 것이 아니다. 도덕성에는 그러한 거래의 흔적이 아니라, 두 사람이 "우리는 성스러운 곳에서 서로 때리지 않아야 한다"라고 말한 흔적이 있다. 그들은 그들의 종교를 지킴으로써 그들의 도덕성을 얻었다.

   

한 사람을 살해한 인간은 단지 한 명의 인간을 살해한 것이지만, 자기 자신을 죽이는 인간은 모든 인간을 죽이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죽인 인간은 이 세상 자체를 말끔히 없애버린 행동을 한 것과 다름없다.

   

가장 일반적인 문제점은 바로, 이 세계가 대체로 합리적이기는 하지만 완전히 합리적이지는 않다는 사실이다.

   

다윈주의는 두 개의 불합리한 도덕성을 지지하는 데 이용될 수 있지만, 단 하나의 건전한 도덕성을 지지하는 데는 이용될 수 없다. 모든 생물의 혈족 관계와 경쟁은 광적인 잔인함이나 광적인 감상에 대한 하나의 근거로는 이용될 수 있지만, 동물들의 건강한 사랑에 대한 근거로는 이용되지 못한다. 진화론적인 토대 위에서 여러분은 비인간적일 수도 있고, 부조리하게 인간적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인간적이 될 수는 없다.

   

   

현대의 우주적 종교는 사실상 "자연은 우리의 어머니"라는 명제 안에 있다. 그런데 불행히도, 자연을 어머니로 간주하면 자연이 계모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 우리는 자연에 탄복할 수 밖에 없지만 자연을 본받을 필요는 없다.

   

가장 낡은 것, 시대에 뒤진 것이라고 불리는 바로 그 교리가 이 세상 새로운 민주주의의 유일한 보호 수단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겉보기에는 가장 인기 없는 교리가 사람들에게 유일한 힘의 원천이 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기적을 거부할 정도로 시대에 뒤떨어진 유일한 것은 바로 새로운 신학이다. 그러나 기적을 부인할 자유가 있다는 이 개념은 기적을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증거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것은 원초적 삶과 시작이 생각의 자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유물론의 독단에 있다는 맥빠진 언어적 편견이다.

   

자유주의처럼 휴일은 오직 인간의 자유를 의미한다. 기적은 오직 신의 자유를 의미한다.

   

환자는 수동적인 상태에 있다. 반면에 죄인은 능동적인 상태에 있다.

   

"모든 종교가 시작되는 지점은 정확히 생물학이 중단되는 바로 그 지점이다" 라는 유물론의 제1의 표면적인 근거는 오히려 유물론과 정반대되는 것을 위한 근거가 된다.

   

   

그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에 그리스도교를 의심한다. 그러나 기적은 일어난다. 그는 수도사들이 게으르다는 이유 때문에 그리스도교를 의심하지만 수도사들은 대단히 부지런하다. 그는 수녀들의 불행하다는 이유 때문에 그리스도교를 의심하지만 수녀들은 정말로 명랑하다. 그는 그리스도교 예술이 슬프고 활기가 없다는 이유 때문에 그리스도교를 의심하지만 그리스도교 예술은 유독 밝은 색깔과 금빛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그는 현대 과학이 초자연적인 것으로부터 멀어져 가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교를 의심하지만, 현대 과학은 기차만큼 빠르게 초자연적인 것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모든 이성적 생각은 편협하다. 인간의 건강을 유지시켜 주는 것은 신비주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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