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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것에 눈뜨다, 마크 부캐넌 본문

읽고 또 읽고/기독교

보이지 않는 것에 눈뜨다, 마크 부캐넌

bangla 2016. 4. 16. 2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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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령과 마음을 천국으로 가득 채운 사람들만이 이 세상을 진정으로 원할 수 있고 제대로 인식할 수 있다. 오직 그들만이 유토피아에 대한 환상이나 전제적 폭압에 탐닉하지 않고 세상을 제대로 이끌어갈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유익을 끼치며 합당한 삶을 살려면 두려움이 없어야 한다. 여기엔 죽음의 두려움으로부터 자유, 재산 손실을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 명예와 지위와 직함과 위안의 상실을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 폭군의 위협과 군대의 힘과 고통의 나날들을 무서워하지 않는 마음이 요청된다.

   

당신은 세 개의 팔을 가지고 싶은가? 눈 세 개는? 우리는 한때 맛보았던 것, 가졌던 것, 손에 쥐었던 것, 알았던 것을 그리워한다. 우리가 가지고 있던 눈이나 팔이나 다리를 잃었을 때 슬퍼하는 것이지, 단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던 것 때문에 슬퍼하는 게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 심령이 이토록 비참한 상실감을 맛보는 까닭은 무엇인가? 우리가 무엇을 갖고 있다가 잃었기에 이토록 지독한 상실감에 시달리는 것일까?

   

우리 모두가 다음에 할 일, 다음 주, 다음 계획 등 '다음'이란 물건을 위해 살고 있다.

   

인간은 갈망과 소원 때문에 부패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을 부패하게 하는 것은 잘못된 갈망, 잘못된 것을 바라는 소원이다. 만일 우리가 이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즉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천국에 두도록 하기 위해 우리 심령에 영원을 심어주셨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갈망을 왜곡하고 곡해하여 수천 가지 그릇된 방향으로 분산시킬 것이다.

   

세상의 즐거움은 그 욕구를 불러일으키고 참된 것들을 암시할 수는 있어도 욕구를 결코 만족시킬 수는 없다.

   

자기초월의 욕구와 자기 성취의 욕구의 공존…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서 추방되어 있다. 그래서 자신으로 돌아가기를 갈망한다. 우리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소외되어 있다. 그래서 다시 합쳐지기를 원한다. 집에 가려 한다. 이 세상에서는 이 두 가지의 충동의 싸움이 그치지 않을 뿐 아니라 그 어느 것도 충족되지 않는다.

   

천국에서의 가치는 희소성이 아니라 풍요성에 따라 증대된다. 면류관이 많을수록 그 가치가 증대된다는 말이다…. 모든 것들이 더 좋은 것이나 더 나쁜 것도 없이 그 자체로 무한한 특질을 지니며 존재한다. 천국에서는 모든 것들이 합당한 형태로, 마땅히 그렇게 되어야 할 바대로 존중받는다. 거기선 모든 것이 완벽하며 완전하다.

   

천국은 우리의 깊은 갈망에 해답을 제시하는 동시에 우리의 깊은 슬픔을 위로하는 유일한 곳이다. 천국에서는 완벽한 정의와 완벽한 기쁨과 완벽한 평화를 향한 우리의 배고픔이 온전히 충족될 것이다.

   

인생이 인생의 근거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오직 영원만이 인생의 근거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오직 예수님만이 영원을 우리에게 줄 수 있다.

   

좋은 죽음을 준비한다는 것은 죽음을 위해 산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죽음을 소원하는 것도 아니며, 죽음을 갈망하는 것도 아니고, 죽음에 매료되는 것도 아니다. 그보다 좋은 죽음을 준비한다는 것은 죽음이 끝이 아니라 완성이 되게끔 인생을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야말로 우리가 인생의 모든 찌꺼기와 성패를 통해 그것의 참된 실체를 분별할 만큼 명민해진다. 죽음은 예배보다, 기도보다, 집에 돌아왔을 때의 환희 보다 더 강하고 독특한 힘을 지닌다. 그 힘이란 바로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떨게 하고 하나님의 임재를 갈망하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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