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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훈련과 성장 - 리처드 포스터

bangla 2016. 4. 16. 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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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훈련과 성장 - 리처드 포스터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의지와 힘을 발휘함으로써 우리 자신의 마음을 자유케 수도 없고 정결케 수도 없다는 것을 명백히 두고자 한다.

.....당신은 어떤 원치 않는 상황을 정신적으로 대항하는 순간, 당신은 그것에 보다 힘을 부여하게 된다. 결국 상황은 그렇게 부여된 힘을 사용해서 당신을 대항한다. 그래서 당신 자신의 자원은 그만큼 고갈된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의지의 힘으로 자신을 구할 있다고 생각하는 , 우리는 우리 속의 악의 세력을 보다 강하게 만들 뿐이다.

   

이런 점에서 훈련으로 은혜 받는 길이라는 말은 합당한 말이다. 은혜는 값을 내지 않고 거져 받는 다는 의미가 있고, 훈련은 우리들에게 무엇인가 바가 있다는 의미가 있다.

디트리히 본회퍼는 제자가 되기 위한 대가에서 은혜는 값을 내지 않고 받는 것이지만 결코 값싼 것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밝혔다. 일단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의 힘으로 얻을 없다는 것을 명백히 이해하였다면, 그리고 우리가 성장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의식적으로 일련의 선택적 행동을 지속해야 한다. 여기에는 개인의 삶과 단체 생활 모두가 포함된다. 바로 이것이 영적 훈련의 목적이다.

   

자비의 특성은 억지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어떤 선행도 역시 억지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성령의 사람의 영적인 선행은 저절로 흘러 나온다.

   

현대사회의 우리의 대적은 다음 세가지, 시끄러움과 조급함 혼잡함을 통하여 크게 역사한다. 우리의 대적은 우리들이 물량주의에 빠지게 했을 만족한다. 융은 조급함은 사탄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자체가 사탄이다라고 말한다.

   

기독교의 묵상 개념을 중요시하는 곳에는 반드시 그것을 동양의 종교의 묵상 개념과 간은 것으로 보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실상은 두가지 개념이 세상을 나누어 놓는다. 동양의 묵상은 마음을 비우기 위한 노력이다. 반면에 기독교의 묵상은 마음을 채우기 위한 시도이다. .... 초연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하나니께 더욱더 나아가야 한다. 기독교의 묵상은 우리 자신을 자유롭게 하나님께 드리는 필요한 내적 완전함으로 이끌어준다.

   

나는 종종 영적인 세계가 실제로 있는지를 동안도 찾아보지 않고 영적인 세계를 거리낌 없이 비방하는 사람들을 본다. 영적인 세계의 실재에 대해 실험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다른 모든 과학적 노력이 그러한 것과 마찬가지라 우리는 가설을 세우고 가설이 진실인지 아닌지를 알아보기 위하여 시험을 해야 한다. 우리의 첫 번째 실험이 실패한다 대도 우리는 실망해서는 안되고 모든 것이 거짓이라고 속단해서도 된다. 우리는 우리의 절차를 재조사하고 다시 실험하며 이와 같은 일을 꾸준히 하기를, 최소한도 모든 과학의 분야에서 하는 것과 같은 정도로 해야 한다.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기를 싫어한다는 사실은 그들 자신의 지성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편견을 드러내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임재하심 안에 있다는 것은 변화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방법은 도덕적 변화를 필요 없이 종교적 체면을 유지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대단히 편리하다. 중재자의 종교에 의하여 마음이 사로잡혀 있는 현실은 오늘의 문화를 조금만 관찰해도 있다. 묵상을 두렵게 생각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묵상은 우리들로 하여금 우리들 자신이 살아 계신 하나님 앞에 나아갈 것을 요구하며 하나님께서 지금 말씀하고 계시고 또한 우리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우리들에게 가르쳐 준다.

   

어떤 사람이 기도를 하였는데, 처음에는 기도는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는 점점 조용하게 되어서 결국 기도는 듣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키에르 케고르

   

하나님이 영혼에게 미소를 보내고 그리고 영혼이 하나님께 미소의 반응을 나타낼 영혼은 인격의 열매를 맺는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우리의 정신적 삶을 한꺼번에 하나의 이상의 수준에 머물게 있는 방법이 있다. 수준에서는 우리가 모든 외적 일의 요청을 생각하고,논의하고, 이해하고, 계산하고, 그리고 대처한다. 그러나 외적인 배후에 있는 보다 깊은 수준에서는 우리가 또한 기도하며, 찬양하고 경배하며, 거룩한 영감을 받아들일 있다.

   

학습은 겸손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 들어나게 된다. 우리가 학습 내용을 받아들이기를 원하지 않는 , 학습은 이루어질 없다. 우리는 체제에 굴복해야 한다. 우리는 학생이 되어야 하며 교사가 되어서는 된다. 학습은 겸손에 의존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겸손하게 되는 도움을 준다. 교만과 배우는 자세는 서로 배타적이다.

   

우리는 우리가 원해서 물품을 사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어떤 인상을 주기 위해 그것을 산다.

   

중독을 어떻게 분별할 것인가? 아주 간단하다. 훈련되지 못한 강박 행동으로 보면 된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있어서 내가 해야 일은 무엇일까? 긍정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기 위하여 적절한 직업을 구해야 할까? 아니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라고 하셨다. 그러면 나는 나의 모든 재산을 풀어 가난한 사람들을 먹여야 할까? 아니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라고 하셨다. 그러면 나는 세상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구해야 한다고 선포해야 할까? 아니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 있어서 내가 해야 일은 아무 것도 없다. 분명히 그렇다. 하나님 앞에서 아무일도 하지 않고 고요히 있기를 배워야 한다. 고요함이,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것의 시초이다.

   

우리가 고요함 가운데 머무르지 못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고요함이 우리를 무력하게 만든다고 생각하는 있다. 우리는 말을 의지하여 다른 사람들을 다스리는 습관이 되어 있다. 만약 우리가 고요한 가운데 있다면 누가 다스리는 일을 할까? 하나님께서 일을 하신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기 전에는 다스리는 일을 하나님께 맡기지 않을 것이다. 고요함은 신뢰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내가 나의 형제들을 진실로 사랑할 있는 온유함을 찾은 것은 홀로 있기를 통해서였다. 홀로 있기에 깊이 들어갈수록 나는 나의 형제들에 대하여 보다 많은 애정을 가지게 되었다...... 홀로 있기와 고요함은 나의 형제들을 사랑하되 그들의 말에 의거하여 사랑할 것이 아니라 그들의 존재 자체에 의거하여 사랑할 것을 나에게 가르쳐 주었다.

   

자기 부인은 자기 멸시와 동일한 것이 아니다. 자기 멸시는, 우리가 아무 가치도 없는 존재라고 주장한다. 비록 우리가 가치 있는 존재라 할지라도 가치를 배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자기 부인은 우리가 무한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선언하고 가치를 어떻게 깨달을 있는지를 가르쳐 준다.

   

우리 자신의 의견을 갖지 않고 항상 다른 사람들을 좋게 그리고 높게 생각하는 것이 훌륭한 지혜이며 온전함이다.

   

주님의 뜻을 따라 주님이 원하시는 일을 주님께서 원하시는 때에 행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사람들이 당신을 딛고 있도록 그리고 길의 흙을 밟듯이 당신을 밟을 있도록 ... 복종하라.

   

그리스도께서 그의 친구들에게 주시는 성령의 모든 은혜화 은사들 가운데서 가장 뛰어난 것은 자기 자신을 이기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위하여 고난과 모욕과 수치와 역경을 기꺼이 참는 것이오.

   

프랑수아 살르는, 덕행은 설탕과 같고 작은 성실은 소금과 같다고 말하였다. 설탕은 탁월한 맛을 가지고 있지만 사용 빈도는 적다. 그러나 소금은 어디에서나 찾아볼 있다. 덕행은 드물게 발생하는 것이지만 작은 섬김은 날마다 있어야 하는 것이다. 과업은 잠시 동안의 희생을 요구하지만 작은 과업은 지속적인 희생을 요구한다.

   

자신의 시간이 너무나 귀중한 것이기 때문에 조용한 가운데 시간을 보내는 일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결국 자신과 자기 자신의 어리석음을 위해 시간을 사용할 있을 하나님과 형제들을 위해서는 시간을 사용할 없다.

   

그러나 고백은 훈련이 아니라 은혜이다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고백은 은혜도 되고 훈련도 된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진정한 고백이 이루어질 없다. 그러나 고백은 훈련도 된다. 왜냐하면 고백에는 우리가 해야 일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를 전능하신 분의 그늘 아래로 나아가게 하는 것은 우리가 의식적으로 행동의 방향을 선택하는 있다.

   

우리는 모두가 죄인이다. 우리는 서로 고백하는 행동을 통하여 치료하는 능력이 작용하게 있다. 우리의 인간성은 부인되어야 것이 아니라 변화되어야 한다.

   

동양종교와는 대조적으로 기독교 신앙은 단체 예배를 대단히 강조하였다. 위험이 따르는 상황 속에서도 초대 교회 공동체는 함께 모이기를 폐하지 말도록 촉구 받았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받지 못한 설교는 서릿발같이 예배를 냉랭하게 한다. 마음으로부터 하는 설교는 예배의 영에 불을 붙이지만, 두뇌의 설교는 불을 덮어 끈다. 성령의 감동을 받아 하는 설교만큼 생명을 주는 것은 없고, 인간의 사상으로 하는 설교만큼 치명적인 것도 없다.

   

예배에 들어가는 첫째 방법은 인간 주도적인 모든 활동을 멈추는 것이다. 인간 주도적인 모든 활동을 멈춘다는 것은 교회의 예배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생활 속에 스며들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항상 내적으로 고요한 가운데 듣는 생활을 함으로써 우리의 말과 행동이 하나님께로 나오도록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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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에서의 신체적 반응은 어느 모양으로든 조종되어서는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의 마음에 감동을 주시는 대로 반응할 있는 자유를 허용해야 한다.

   

작은 의지만 있어도 테니스 교습이나 피아노 레슨을 시작할 있다. 그러나 기쁨이 없으면 오래 지속할 없다. 사실 우리가 시작 있는 유일한 이유는 마지막 결과가 기쁨이라는 것을 안다는 것이다. 이것이 초심자들이 계속 있게 해주는 것이다. 그들은 익혔을 즐거움과 기쁨이 있을 것을 알고 있다.

기뻐함은 모든 영적 훈련에 있어서 핵심적인 것이다. 훈련의 기쁨이 없는 영적 훈련은 모두 현대판 바리새인들의 손에 있는 따분하고 답답한 도구가 된다. 모든 영적 훈련은 근심 없는 기쁨과 감사로 특징 지어져야 한다.

   

찬양은 우리들에게 균형 잡힌 시각을 준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보고 웃을 있고, 우리가 옹호하고 있는 것이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만큼 엄청난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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