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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건, 자신을 낮추고 새 시대를 열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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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건, 자신을 낮추고 새 시대를 열다

bangla 2016. 9. 26. 0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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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  건

-자신을 낮추고 새 시대를 열다-

 

이 익 주

(서울시립대학교)

 

§   한국사에서 분열과 통일

 

§  삼국 시대 à 신라의 삼국 통일(668, 676)

§  一統三韓

§  남북국 시대 : 신라와 발해

§  후삼국 시대 à 고려의 후삼국 통일(936)

§  삼국분립 의식 : 삼국 부흥운동

§  남북 분단 시대 à ?

 

 

통일의 리더십

 

 

 

 

왕건이 살았던 시대

(877~943)

 

§   신라 하대(下代)  *중대(中代) : 654~780

§  진골 귀족의 분열 : 왕위 쟁탈전 *780-935, 155년 동안 국왕 20명 교체

§  진성여왕(887~897)의 폭정 *여왕은 각간 위홍이 죽은 뒤 잘 생긴 남자들을 끌어들여 음란하게 놀고, 그들을 요직에 앉혀 국정을 맡겼다. 총애받는 자들이 방자하게 굴어 뇌물이 공공연히 돌고 상벌이 불공정해져 기강이 무너졌다.

§  농민 반란 : 중앙 정부와 귀족들의 수탈에 반발 초적(草賊)

§  지방 세력가들의 독립 : 호족(豪族)   *‘지방’의 대두

 

§   후삼국 성립

§  견훤 : 후백제 건국(892, 완산주=전주)      867-936

§  궁예 : 후고려 건국(901, 송악=개성)           ? -918

§  왕건 : 고려 건국(918, 철원→송악)           877-943

 

§   신라 하대의 민란

진성여왕 3(889) 국내의 여러 주현들이 세금을 납부하지 않으므로 나라의 창고가 텅 비어 재정이 궁핍하였다. 이에 왕이 사람을 보내 독촉하자 각지에서 도적들이 일어났다. (삼국사기11)

 

§  사벌주(상주)의 원종·애노,

§  북원(원주)의 양길·궁예,

§  죽주(죽산)의 기훤,

§  완산(전주)의 견훤

§   촌주들의 자립

§  초적에 맞서 촌락 방어

        성주, 장군을 자칭

§  호족(豪族)의 출현

 

§   새로운 희망

 

§  유교 정치사상

§  도당(渡唐) 유학생들의 귀국 : 6두품 지식인 (: 최치원)

§  합리적 유교정치 : 치자(治者)의 도리’, 위민(爲民) 정치’

à폐쇄적인 골품제에 대한 비판 *global standard

§  선종 불교의 도입

§  9산 선문의 성립

§  교종 중심의 중앙 불교에 도전

à6두품 지식인, 선종 승려와 호족의 결합

§  풍수지리 사상의 도입

§  지방 개발의 논리

§  지방 세력에게 정당성 부여

 

§   신라 말의 9산 선문

 

§   왕건의 출신 배경

 

§  송악(개성)의 호족

§  견훤 : 군인 출신의 지방세력.

§  궁예 : 초적의 무리를 모은 적당(賊黨) 세력. 반신라 감정

 

§  왕건의 가계

*고려세계(高麗世系) : 편년통록(編年通錄)

§  虎景 ━ 康忠 ━ 寶育 ━ 辰義

               ┣━━ 作帝建

                                  唐 肅宗     ┣━━ 龍建 ━ 王建

                                               龍女

 

 

ü  왕건(王建)

 

옛날에 호경(虎景)이라는 사람이 “성골장군이라고 자칭하면서 백두산으로부터 산천을 두루 구경하다가 부소산 왼쪽 산골에 와서 장가를 들고 살았다. 그의 집은 부유했으나 아들이 없었다. 하루는 마을 사람 9명과 함께 평나산에 매를 잡으러 갔다가 날이 저물어 바위굴에서 자게 되었다. 그때 범 한 마리가 굴 앞을 막고 큰 소리로 울었다. 열 사람이 서로 말하기를 범이 우리를 잡아먹으려고 하니 각자의 관을 던져서 범이 무는 사람이 나가서 일을 당하기로 하자. 하고는 모두 관을 던졌다. 범이 호경의 관을 무는지라 호경이 나가서 범과 싸우려고 하는데 범은 사라지고 굴이 무너져 아홉 사람은 모두 죽었다. 호경이 돌아와 알리고 다시 산으로 가서 9명의 장사를 지냈다. 산신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산신이 나타나 말하기를 “나는 본시 과부로 이 산을 주관하는데 당신을 만나게 되어 부부의 인연을 맺고 함께 신정을 펼치려 하니, 우선 당신을 이 산의 대왕으로 봉하겠습니다.라고 했다. 말이 끝나자 산신과 호경이 보이지 않았다. 평나군 사람들이 호경을 대왕으로 봉하고 사당을 세워 제사지냈다. 그 후 호경은 옛 부인을 잊지 못하여 항상 밤에 꿈과 같이 나타나 동침했다. 그 후 아들을 낳으니 이름이 강충이었다.

 

강충(康忠)은 생김새가 단정하고 근엄하며 재주가 많았다. 서강 영안촌 부잣집의 딸 구치의(具置義)에게 장가를 들어 오관산 마가갑에서 살았다. 그때 신라의 감간 팔원이라는 사람이 풍수를 잘 알았는데 마침 부소군에 왔다가 부소군이 부소산 북쪽에 있었으므로 형세는 좋으나 나무가 없는 것을 보고 강충에게 말하기를 만일 부소군을 산 남쪽으로 옮기고 소나무를 심어 바위가 나타나지 않도록 하기만 하면 거기서 삼한을 통일할 사람이 태어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강충은 군 사람들과 함께 산 남쪽으로 이사하고 산에 소나무를 심어 고을 이름을 송악군(松嶽郡)이라고 고쳤다. 그는 (송악)군의 상사찬이 되었고, 마가갑 저택을 세전하는 재산으로 하여 그곳에 왕래하면서 살았다. 누천금의 재산을 모으고 두 아들을 낳았는데 둘째 아들이 손호술(損乎述)이었다. 후에 보육(寶育)이라고 이름을 고쳤다.

 

보육(寶育)은 성품이 지혜로웠으며, 중이 되어 지리산에 들어가 불도를 닦았다뒤에 평나산 북쪽 기슭으로 돌아와 살다가 다시 마가갑으로 옮겼다. 어느 날 꿈에 곡령에 올라가 남쪽을 향해 오줌을 누었는데 그 오줌이 천지에 가득 차서 산천이 은해(銀海)로 변하는 것이었다. 이튿날 형 이제건(伊帝建)에게 그 이야기를 했더니 이제건이 네가 반드시 하늘을 버티는 기둥을 낳을 것이다.라고 하고는 자기의 딸 덕주(德周)를 주어 처로 삼게 하였다. 보육은 뒤에 거사가 되어 마가갑에 암자를 짓고 살았다. 신라 술사(術士) 한 사람이 와서 보고 말하기를 여기서 살면 반드시 당나라 천자가 와서 사위로 삼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보육의 둘째 딸 이름은 진의(辰義)인데 얼굴이 곱고 재주와 지혜가 많았다. 진의가 막 성년이 되었을 때에 그의 언니가 오관산 마루턱에 올라앉아 오줌을 누었더니 그 오줌이 흘러 천하에 가득 차는 꿈을 꾸었다. 진의에게 꿈 이야기를 하자 진의가 비단 치마를 가지고 그 꿈을 사겠다고 하기에 그러자고 하였다. 진의는 언니에게 그 꿈 이야기를 다시 하게 하고 그것을 움켜 쥐면서 품에 품는 시늉을 세 번 하였다. 그랬더니 몸이 움직이고 무엇인가를 얻는 것 같았다. 진의는 그것으로 자부심을 가지게 되었다.

 

 

 

당나라 숙종(肅宗)이 즉위하기 전에 천하 산천을 두루 유람하기 위해 753년 봄에 바다를 건너 패강 서포에 당도하였다. 숙종 황제는 송악군에 와서 곡령에 올라 남쪽을 바라보고 말하기를 이 땅은 도읍을 이룰 만한 곳이다.라고 하였다. 이들은 마가갑의 양자동에 와서 보육의 집에 유숙하게 되었는데, 숙종은 두 처녀를 보고 기뻐하여 자기의 옷 터진 것을 꿰매달라고 하였다. 보육은 그가 중국의 귀인인 줄 알고 술사의 말이 과연 맞는다고 생각하여 맏딸을 들여보냈더니 문지방을 넘자마자 코피가 터져 되돌아 나왔으므로 진의를 들여보내 모시게 하였다. 숙종은 머문 지 한달 만에 진의에게 태기가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떠나면서 자신이 당나라의 귀인이라는 것을 밝히고 활과 화살을 주면서 만일 아들을 낳거든 주라고 하였다. 그 후 과연 아들을 낳았는데, 이름을 작제건이라고 하였다.

 

작제건(作帝建)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용맹이 있었다. 56세쯤 되었을 때 어머니에게 아버지가 누구냐고 물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당나라 사람이라고만 대답했는데 그 이유는 남편의 이름을 몰랐기 때문이었다. 작제건이 점점 자라서 재주가 육예(六藝)를 다 잘 했고 그 중에서도 글씨와 활 재주가 뛰어났다. 16세 때에 어머니는 아버지가 남겨두고 간 활과 화살을 주었더니 작제건은 크게 기뻐했다. 활을 쏘는 데 백발백중이었으므로 세상 사람들은 그를 신궁이라고 불렀다. 작제건은 아버지를 찾아가기 위해 상선을 타고 떠났는데 바다 복판쯤 와서 구름과 안개가 자욱이 껴 배가 사흘 동안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뱃사람들이 점을 쳐보니 함께 탄 고려 사람을 내려놓고 가야 한다고 하였다. 작제건이 활과 화살을 들고 바다로 뛰어내렸는데 마침 밑에는 암석이 깔려 있어 그 위에 서게 되었다. 그와 동시에 안개는 흩어지고 바람이 순해져 배가 나는 듯이 가 버렸다.

 

조금 있더니 한 노인이 나타나 절을 하면서 말하기를, 나는 서해의 용왕이다. 요사이 매일 저녁 늙은 여우 한 마리가 치성광여래의 모습을 하고 공중에서 내려와 일월성진을 운무 중에 늘어놓고는 나팔을 불고 북을 치며 이 바위 위에 앉아 옹종경을 읽는데, 그러면 내 머리가 몹시 아프다. 듣건대 그대가 활을 잘 쏜다고 하니, 원컨대 그 궁술로 나의 괴로움을 없애 달라.고 하였다. 작제건이 그러기로 약속하고 기다리는데, 노인이 말한 때가 되자 공중에서 음악 소리가 들리고 서북쪽에서 내려오는 자가 있었다. 작제건은 그것이 정말 부처가 아닌가 의심하여 감히 쏘지 못했는데, 노인이 다시 와서 정말 늙은 여우임에 틀림없으니 의심하지 말고 쏘라고 하였다. 작제건이 활을 쏘았더니 시위 소리와 동시에 떨어지는 물건이 있었는데 과연 늙은 여우였다. 노인이 크게 기뻐하면서 작제건을 궁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서 감사하며 그대의 힘으로 나의 근심이 덜어졌으니 이 큰 은혜를 갚으려 하노라. 그대는 앞으로 서쪽 당나라로 들어가서 천자인 아버지를 만나겠는가? 그렇지 않으면 칠보를 가지고 동쪽으로 돌아가서 어머니를 모시겠는가?라고 하였다.

 

작제건이  “나의 소원은 동방의 임금이 되는 것이다.라고 하니 “동방의 임금이 되려면 ‘건()자 붙은 이름으로 자손까지 3대를 거쳐야 한다. 다른 것은 그대의 소원대로 해주겠노라.하였다. 작제건이 그 말을 듣고 임금이 될 때가 아직 오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주저하며 대답을 못하고 있는데, 그 뒤에 있던 노파가 웃으면서 “왜 그 딸에게 장가를 들겠다고 하지 않는가?라고 하였다. 작제건이 그제야 깨닫고 사위 되기를 청하니 용왕은 장녀 저민의를 그에게 처로 주었다. 작제건이 칠보를 가지고 돌아오려는데 용녀가 말하기를, 우리 아버지에게 버드나무 지팡이와 돼지가 있는데 그것은 칠보보다 더 귀중한 것입니다. 그것을 달라고 해서 가지고 가도록 하십시오.라고 하였다. 작제건이 칠보 대신 버드나무 지팡이와 돼지를 가져가기를 원하니 용왕은 “그 두 물건은 나의 신비롭고 귀중한 물건이다. 그러나 기왕 자네가 청하니 어찌 거절하리오.라고 하면서 돼지를 주었다. 작제건은 옻칠한 배에 칠보와 돼지를 싣고 바다에 떠서 순식간에 해안에 다다랐다 1년이 지난 어느 날 돼지가 우리로 들어가지 않자 “만일 이곳이 살 곳이 못 된다면 내가 장차 너 가는 대로 따라 가겠다.라고 했더니 이튿날 아침 돼지가 송악산 남쪽 기슭에 가 누웠으므로 그 곳에 새 집을 짓고 살았는데 그 곳은 바로 강충이 살던 옛 터였다.

 

용녀는 송악산 새집 창 밖에 우물을 파고 그 곳을 통하여 서해 용궁으로 다녔다. 그녀는 작제건과 약속하기를 “내가 용궁으로 돌아갈 때에는 절대로 보지 마세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어느 날 작제건이 몰래 그것을 들여다 보았더니 용녀가 어린 딸과 함께 우물로 가서 황룡이 되어 5색 구름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작제건은 이상하게 여겼으나 감히 말은 못하였다. 용녀가 돌아와서 화를 내며 말하기를 “부부간의 도리는 신의를 지키는 것이 중요한데 어제 당신이 약속을 어겼으니 더는 여기서 살 수 없습니다.라고 하고는 어린 딸과 함께 용으로 변해서 우물로 들어간 뒤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작제건은 만년에 속리산 장갑사에 가서 살면서 불경을 읽다가 죽었다. 용녀는 네 아들을 낳았는데 맏아들을 용건이라고 하였다. 용건은 뒤에 이름을 왕융(王隆)으로 고쳤다.



 

용건(龍建)은 송악산 옛 집에 여러 해 살다가 그 남쪽에 새 집을 지었다. 그때 동리산 조사 도선이 당나라에 들어가서 지리법을 배우고 돌아와 백두산에 올랐다가 곡령까지 와서 세조의 새 집을 보고 “기장을 심을 터에 어찌 삼을 심었는가?라고 하고는 가버렸다. 부인이 마침 그 말을 전하니 용건이 급히 따라가서 만났는데 한 번 만난 후에는 구면과 같이 되었다. 함께 곡령에 올라가 산수의 내맥을 연구하여 위로는 천문을 보고 아래로는 시운을 살핀 다음 도선이 말하기를, 이 땅의 지맥은 북방 백두산 수모목간(水母木幹)으로부터 내려와서 마두명당(馬頭名堂)에 떨어졌으며, 당신은 또한 수명(水命)이니 마땅히 수()의 대수(大數)를 좇아서 六六三十六 구()의 집을 지으면 천지의 대수(大數)에 부합하여 다음해에 반드시 슬기로운 아들을 낳을 것이니 그에게 왕건(王建)이라는 이름을 지으십시오.라고 하고는 그 자리에서 봉투를 만들고 그 겉에 “삼가 글을 받들어 백 번 절하면서 미래에 삼한을 통합할 주인 대원군자(大原君子)께 드립니다.라고 썼다. 때는 당 희종(僖宗) 건부(乾符) 3(876) 4월이었다. 세조는 도선의 말대로 집을 짓고 살았는데 그 달부터 위숙이 태기가 있어 태조를 낳았다.

 

ü  견훤(甄萱*삼국사기

 

견훤은 상주 가은현 사람으로아버지 아자개는 농사를 짓다가 뒤에 출세하여 장군이 되었다. 견훤이 어려서 강보에 있을 때 아버지는 밭을 갈고 어머니는 점심을 차리면서 아이를 숲속에 두었는데 호랑이가 와서 아이에게 젖을 먹였다. 자라서는 체격과 용모가 웅장하고 기이하며, 생각과 기풍이 활달하고 비범하였다. 종군하여 서남쪽 해변에서 수자리를 서게 되었는데, 잘 때도 창을 베고 적을 기다렸다. 그는 용기가 있어 항상 다른 군사들보다 앞장섰으며, 그 공으로 비장이 되었다도적들이 벌떼처럼 일어나자 은근히 반심을 품고 무리를 모아 서울 서쪽과 남쪽을 다니며 치니 가는 곳마다 모두 호응하여 달포만에 무리가 5천 명에 이르렀다. 견훤이 완산주에 이르러 말하기를 당나라 고종이 신라의 요청에 따라 장군 소정방을 보내 수군 13만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오고, 신라의 김유신도 땅을 휩쓸고 와서 황산을 지나 사비에 이르러 당나라 군사와 협력하여 백제를 격멸하였으니, 이제 내가 어찌 서울을 완산에 정하여 의자왕의 오랜 원한을 갚지 않겠는가?하고는 곧 후백제왕이라고 자칭하였다. (삼국사기)

 

ü  궁예(弓裔*삼국사기

 

궁예는 신라인이니 성은 김씨이다. 아버지는 제47대 헌안왕이요, 어머니는 헌안왕의 후궁이었는데 전해지지 않는다. 55일에 외가에서 태어났는데, 그 때 지붕에 긴 무지개와 같은 흰빛이 하늘에 닿았다. 일관이 아뢰기를 “이 아이가 오()자가 거듭 들어있는 날[重午]에 났고 나면서 이가 있으며 또한 불빛이 이상하였으니 장래 나라에 이롭지 못할 듯합니다. 기르지 마셔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환관을 보내 죽이도록 하였는데 환관이 아이를 다락 밑으로 던진 것을 젖먹이던 종이 받다가 잘못해서 눈을 찔렀으므로 한쪽 눈이 멀게 되었다. 종은 아이를 안고 도망하여 숨어서 힘들게 길렀다. 나이 10여 세가 되어도 장난을 그만두지 않자 종이 그에게 말했다. 네가 태어났을 때 나라의 버림을 받았다. 나는 이를 차마 보지 못하여 오늘까지 몰래 길러 왔는데 너의 미친 행동이 이와 같으니 반드시 남들에게 알려질 것이고, 그렇게 되면 나와 너는 화를 면치 못 할 것이다.궁예가 울면서 만일 그렇다면 제가 이곳을 떠나 어머니의 근심거리가 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하고는 곧 세달사로 가서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궁예는 장성하자 중의 계율에 구애받지 않고 방종하였으며 뱃심이 있었다. 어느 날 재를 올리러 가는 길에 까마귀가 무엇을 물고 와서 궁예의 바리대에 떨어뜨렸는데, 궁예가 그것을 보니 점을 치는 산가지에 자가 쓰여 있었다. 궁예는 그것을 비밀에 부치고 스스로 자만심을 가졌다. 신라 말에 정치가 거칠어지자 도처에서 도적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궁예는 혼란한 틈을 이용하여 무리를 끌어 모으면 뜻을 이룰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죽주에 있는 기훤의 휘하로 들어갔다. 그러나 기훤이 오만무례하므로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있다가 북원의 양길 휘하로 들어갔다. 양길은 그를 우대하고 군사를 주어 동쪽으로 신라를 공략하게 하였다. 901년에 궁예가 왕을 자칭하고 사람들에게 “이전에 신라가 당나라에 청병하여 고구려를 격파하였으므로 옛 서울 평양이 황폐하여 풀만 성하게 되었으니 내가 반드시 그 원수를 갚겠다”고 말하였다. 그는 언젠가 남쪽 지방을 다니다가 흥주 부석사에 이르러 벽화에 있는 신라왕의 화상을 보고 칼을 뽑아 그것을 쳤는데 그 칼자국이 아직도 남아 있다.

 

 

 

 

 

왕건의 정책

 

§   호족 끌어들이기

§  중폐비사(重幣卑辭)

§  호족들의 귀부

§  918년 상주 적수(賊帥) 아자개

§  930년 고창전투 : 김선평, 권행 장길 *안동 삼태사

 

§   통일 후의 논공행상

§  군현 이름 정하기 

§  영역 재조정

§  서열화 : - 都護府 - - - - - - 屬縣 - 部曲

§  토성분정(土姓分定) : 호족들에게 성씨 나누어주기 *본관의 기원

§  역분전 지급 : 유공자들에게 토지 지급 性行善惡 功勞大小

§  기타 : 사성(賜姓), 사심관 제도, 기인 제도

 

 

 

[사료]

 

ü  울주(蔚州)는 고려 초에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태조 때 이 고을 사람 박윤웅(朴允雄)이 큰 공이 있어서 하곡(河曲), 동진(東津), 우풍(虞風) 등 현을 합쳐 흥례부(興禮府)를 만들었다.

 

ü  권씨는 김행(金幸)으로부터 시작하는 신라의 대성(大姓)이다. 김행은 복주(福州 :안동)을 지켰는데, 태조가 신라를 치려고 복주에 왔을 때 김행이 천명(天命)이 그에게 돌아가는 것을 알고 읍을 들어 항복하였다. 태조가 기뻐하여 권씨라고 사성(賜姓)하였다.

 

 

§   결혼 정책

§  왕후 6, 부인 23(왕자 25, 왕녀 9)

    1. 神惠王后 柳氏 : 貞州人 天弓의 딸 - 서해중부 해상세력

                                天弓家大富 邑人稱爲長者

    2. 貞和王后 吳氏 : 羅州人 多憐의 딸 - 서해 남부 해상세력

    3. 神明王后 劉氏 : 忠州人 兢達의 딸 - 중부 내륙의 호족

    4. 神靜王后 皇甫氏 : 黃州人 悌恭의 딸 - 예성강 일대의 호족

    5. 神成王后 金氏 : 新羅 敬順王의 조카딸

    6. 貞德王后 柳氏 : 貞州人 德英의 딸

§  신라 왕실과 혼인

§  태조의 제5 왕후 : 경순왕의 조카딸

§  태조의 두 딸 : 경순왕에게 출가시킴

 

 

 

§   대민 정책

§  유교정치 사상 : 위민(爲民)

 

ü  고려 태조가 즉위하여 가장 먼저 토지 제도를 바르게 하고 백성들로부터 세금을 걷는 데 정도가 있게 하였다(取民有度).

 

ü  우왕 14(1388) 7월에 대사헌 조준 등이 상소하였다.

태조가 일어나 즉위한 지 34일만에 여러 신하들을 맞이하여 탄식하며 말씀하시기를, ‘근자에 세금을 너무 많이 거두어 1()의 조세가 6()에 이르니 백성들이 살기가 어렵다. 내가 이를 매우 민망하게 여기니 지금부터는 마땅히 십일(什一)의 법을 써서 밭 1()에서 조 3()을 거두도록 하라.라고 하셨습니다.

     [1: 6= 100: 900à 1: 3= 100: 300]

 

 

§   외교 정책

 

§  신라, 발해 통합

§  신라와 우호 관계 cf. 후백제

§  935년 신라 경순왕의 귀부(歸附) à 정통성의 문제

§  926년 발해 멸망 à 발해 유민 수용 형제의 나라

 

§  대중국 정책

§  907년 당 멸망. 5대의 혼란기(後梁 - 後唐 - 後晋 - 後漢 - 後周)

§  후당의 책봉 : 933년 특진 검교태보 高麗國王

§  견훤 : 925년 검교태위 겸시중 判百濟軍事

§  거란에 적대 정책 à 거란의 침략

 

 

 

§   책봉(冊封)과 조공(朝貢)

 

§  근대 이전 동아시아 세계의 일반적인 국제 관계

§  事大字小 : <맹자> 齊宣王問曰, 交鄰國有道乎?孟子對曰, . 惟仁者爲能以大事小惟智者爲能以小事大以大事小者 樂天者也, 以小事大者 畏天者也. 樂天者保天下 畏天者保其國…” 

§  인자 이대사소(以大事小) 낙천자 보천하(保天下)

§  지자 이소사대(以小事大) 외천자 보기국(保其國)

 

§  근대 이전 한중관계의 일반적인 형식

§  고구려 북위

§  신라, 발해

§  고려 , 거란, , ()

§  조선 , *model tributary

 

 

 

 

 

왕건은 어떻게 성공할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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