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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지식, 고명섭 본문
오디세우스, 세이렌의 유혹은 앎의 유혹임.
이 유혹을 겪은 주인공은 고통을 통해 성숙한다. 그가 견뎌내야 했던 다양한 죽음의 위기를 통해 자신의 삶의 통일성, 인격의 동일성이 확고해진다.
자아는 모험을 두려워하며 모험 앞에서 경직되는 것이 아니라 모험을 통해 강인한 자아, 즉 통일성을 부정하는 다양성 속에서 통일성을 갖게 되는 자아를 형성하는 것이다.
덕이 없는 공포는 재난을 부르고, 공포가 없는 덕은 무력합니다. 공포는 신속하고 엄격하고 강직한 정의의 다른 말입니다. - 로베스피에르의 연설중.
민주주의란 말은 누구나 자신의 꿈과 희망을 싣는 텅 빈 기표다.
오늘날 민주주의가 기업권력의 지배하에 떨어졌다는 것이야말로 민주주의의 위기를 보여준다.
신자유주의는 민주주의의 정치적 실체를 부스러기로 만들어버린 뒤 재 입맛에 맞게 민주주의라는 용어를 탈취했다.
아이히만은 난데없이 나타난 악마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규칙과 명령과 주어진 이상에 맞추려고 노력한 특별하지 않는 사람이었음. 악의 평범성.
순전한 무사유, 사유의 진정한 불능성. - 아렌트
이집트에는 무덤이, 그리스에는 극장이 있다. 삶의 활기는 그리스인의 창안물.
자유의 공기가 사유의 힘을 길렀음. 의심 관찰 추론, 이성이 자라남, 호기심, 철학의 탄생.
이성은 자유를 키우고, 자유는 다시 이성을 양육한다. 자유로운 이성, 이성적인 자유는 이제 그리스인의 본질을 이룬다. 그때의 자유는 누구에게도 양도할 수 없고 어떤 경우에도 포기할 수 없는 최고의 가치, 삶 그 자체가 됨.
인간이 신이 되지 않는 한, 인간에게 고통과 절망은 그치지 않는다. 이것이 인간의 조건이다.
자본주의, 잉여가치를 쥐어짜고 더 늘리는 것이 삶의 목적이 됨. 대다수가 이 착취 체제의 피지배자다. 그런데도 자본주의 체제는 붕괴하지 않는다. 화폐 증식의 욕망, 다시 말해 더 많은 돈을 벌려는 욕망을 모든 사람이 공유하고 있기 때문. 자본가의 욕망을 노동자도 똑같이 지니고 있다. 따라서,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더 많은 것을 얻으려고 벌이는 투쟁은 체제를 더 강화할 뿐 그 체제를 해체하지 못한다. 욕망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자본주의 체제에는 오직 하나의 계급, 부르주아계급만이 있을 뿐이다.
이데아를 내치고 시뮬라크를 복권
식물 변형론, 괴테 : 끝까지 관철되지 못함. 삶에 끼어드는 우연적인 요소의 힘 때문.
얼마나 많은 열매들이 채 익기도 전에 갖가지 우연으로 인해 떨어지는가.
마르크스-레니주의를 소승불교의 사상으로 변형한 것이 폴 포트의 이념. 폭력혁명론에 입각해 불교의 금욕적 삶을 철저하게 실현하는 것이야말로 그의 목표였음. 그러나 그 순수한 이념은 악몽으로 끝남.
브리태니커 신조, 한창기 => 윤석금 회장
그는 세일즈맨들에게 단순히 책을 파는 사람이 아니라 교육사업 종사자이자 교육의 사절이라는 자부심을 불어넣어 주었다.
혁식적 수학, 다비트 힐베르트
벤담의 파노티콘
자유 시장 자본주의가 완성되려면 모든 것이 상품이 되어야 함. - 폴라니
사탄의 맷돌
제도주의적 정치경제학
경제 시스템의 지도적 구성요소인 국가가 적극적으로 시장에 개입해 발전과 진보를 촉진하는 구실을 해야함.
국가의 구실을 기업가 정신에서~
인문학은 돈을 경멸하는 것이 아니라 돈밖에 모르는 사회를 경멸한다. 인문학이 문제 삼는 것은 시장이 아니라 시장전체주의이고 시장 논리가 아니라 시장 논리의 유일 논리화이다. 인문학은 돈 버는 사회를 우려하는 것이 아니라 돈에 미친 사회를 우려한다.
베블런, 자본이 생산요소라는 주장, 다시 말해 자본가가 자본을 투여해 더 많은 부를 창출한다는 주장은 신화적 허구라고 말함. 생산성의 진정한 원천은 지식. 지식은 사회 공동체가 오랜 세월에 걸쳐 축적해온 모든 경험과 기술, 발명과 발견의 총체.
주체의 욕망은 결코 충족될 수 없다. 욕망은 상징계의 질서에 갇혀 그 너머로 나아가지 못하는데, 여기서 그 너머가 바로 실재계다. 실재계란 욕망이 최종적으로 목표로 하는 지점이자 절대로 도달할 수 없는 세계다.
몰로토프 칵테일
놀이와 문화, 경쟁
몽테뉴는 삶이라는 것이 수많은 결함을 지녔음을 알면서도 낙관과 긍정으로 그 삶을 감싸려고 하고, 파스칼은 삶의 결함을 근원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절대자를 불러들인다. 절대자만이 이 해결할 수 없는 모순을 극복할 길을 열어준다는 것이다. 지은이는 두 사람의 견해를 중립적으로 보여주려 하지만, 그의 마음은 최종적으로 파스칼 쪽으로 향한다.
자본주의야말로 그 본질상으로 무신론적.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하려면 이 무신론적이고 사랑 없는 자본주의 체제를 극복해야.
단도직입, 일도양단, 쾌도난마의 정신이 화두의 정신이다. 모든 것을 단칼에 쳐 없애고 마침내 아무것도 남지 않을 때, 거기에 깨달음이 있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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