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땅 순례의 길, 유성종, 이소윤, 한국 기독교 성지순례 가이드
언더우든 선교사가 신을 천주로 번역하자고 할 대 게일 선교사는 마펫 선교사와 함께 하나님이라고 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메리 스크랜턴, 53세의 고령으로 선교사 파송을 받고 옴. 한국 최초의 여성 선교사.
그것은 나에게는 참된 의료선교 사역의 극치에 놓인 일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우리들은 병으로 괴로워하는 그들을 돌보아 주어야 하며 그러한 친절한 섬김을 실천하는 것은 우리에게 명령된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많은 생명들을 구해야 하며 만약 그렇지 않다면 결과적으로 얼마나 많은 영혼들을 잃어버리는 것입니까? 나는 그러한 선한 사마리아인 병원을 시작하도록 허락해 줄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 윌리엄 스크랜턴
스크랜턴 대분인은 모든 계층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장례식 날 운구를 하기 한 시간 전에 궁궐에서 관리가 나와 그의 시신이 담긴 관 앞에서 세 번 절을 하여 예를 표하였다. 한국인들은 대부인이 만약 자기 나라에 살았더라면 왕비가 되고도 남았을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이들 마음속에 그가 왕비 같은 존재로 남았다는 것은 연령과 성병과 신분을 초월하려 수천 명이 마지막 안식처인 한강변까지 운구하는 5마일(8km)을 뒤따랐다는 것에서 확인되었다.
조상문 목사
조선의 3.1운동이 신분 고하와 남녀 구분 없이 모든 계층이 참여한 운동이었는데 그런 연합이 가능하게 한 곳은 교회뿐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3.1 운동의 주동 세력은 대부분 기독교인이 거나 교회와 관련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뿐 아니라 당시 교회는 전국에 가장 빠른 속도로 3.1운동을 알리고 동조하게 하는 강력한 네트워크를 갖고 있었다. 또한 교회는 조선 사회에서 유일하게 공공장소에서 한글을 가르치고 언문을 쓰는 공동체였다. 일제의 입장에서 보면 교회가 바로 3.1운동의 거점이었다.
스코필드 박사, 제암리 사건을 장로회 기관지에 알림, 추방당함.
1969년 한국으로 영구 귀국한 그는 사회봉사에 헌신하다가 1970년, 8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3.1운동 민족 대표 33인에 이은 34번째 민족 대표로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됐다.
선교사들의 노력이 있었지만, 비극의 흔적은 끔찍했다. 평화롭던 마을에는 시커먼 재만 남았고, 살아남은 몇 안 되는 주민들은 모두 마을을 떠났다. 주변에서는 예수 믿다가 망한 동네 라고 수군거렸다. 하지만 전동례 할머니와 서너 명의 교인들은 진실을 알리기 위해 마을에 남았다.
소래교회
고난의 명상, 주기철 목사의 마지막 설교
이수정의 서한
예수 그리스도의 종 된 나 이수정은 미국에 있는 형제자매님들에게 문안합니다. .. 아직도 수천만 우리 민족은 하나님의 참된 도를 모른 채 이방인처럼 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불행하게도 지구 한쪽 구석에 박혀 있어 기독교가 주는 축복을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는 비록 영향력이 없는 사람이지만 여러분이 선교사들을 파송만 해준다면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제 기쁨은 한이 없겠습니다… - 그리스도의 종, 이수정 드림, The Gospel in All Lands 에 실림.
종순일
강화도, 독특한 기독교 문화, 일 자와 신 자를 씀.
검정개로 놀림당함.
1898년 고씨 부인이 71세로 별세하였을 때 기독교식으로 장례를 치름. 십자가로 세움.
유관순과 앨리스 샤프 선교사
3.1운동 민족 대표 중 하나였던 손병희가 징역 3년을 선고 받았다는 점을 볼 때 이들이 받은 5년형은 상당한 중형이었으며, 유관순이 미성년에 여자임을 상기한다면, 그녀가 만세운동에 얼마나 큰 역할을 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상에어린이단사건, 일본의 왜곡된 역사 강요 교육에 거부.